[동서남북] 김치 덕분에 제2의 韓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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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에 사스를 막는 효과가 있다고 믿습니다. "

지난 17일 오전 홍콩 섬의 중심가인 코스웨이 베이의 타임스 스퀘어 빌딩 앞. 홍콩 한인상공회가 주최한 '홍콩 축복 대행진'에 참석한 홍콩의 인기 MC 켄 찬(중국 이름 陳啓泰)은 공개적으로 '김치 예찬론'을 펼쳤다.

그는 아주(亞洲)TV에서 '1백만달러 퀴즈 쇼'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이날 행사는 홍콩에 진출한 기업.교민들이 합심해 마련한 '한국 식품 바자'. 김치.홍삼.라면 등을 이틀간 판 수익금 50만홍콩달러(약 8천만원)는 사스 퇴치 일선에서 뛰는 홍콩의 의료인들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이 자리에 나온 중화권의 최고 인기 스타 켈리 찬(陳慧琳)은 "한국인들의 홍콩 사랑에 가슴이 뜨거워진다"며 "한국 음식 중에 갈비와 김치.떡볶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사스에 지친 홍콩과 중국에선 요즘 과학적인 근거도 없이 "한국인들이 사스에 걸리지 않은 것은 김치와 마늘 덕택"이라는 입소문이 퍼졌다. 그러면서 한국 전통식품의 인기가 치솟고, 한국 식당들이 각광받고 있다.

한국에서 김치를 수입.판매하는 코프코㈜의 임일봉 이사는 "김치 판매량이 사스를 계기로 20~30% 늘었다"고 말했다. 특히 중국인들의 입맛에 맞춰 최근 개발한 김치라면(辣白菜)의 경우 물량을 대기에 바쁘다.

이날 행사장에서도 홍콩의 30대 주부 애니카는 "남편과 딸이 좋아한다"며 하나에 10홍콩달러(약 1천6백원)인 김치 봉지를 세개 골랐다.

홍콩에서 두 곳의 '서라벌'식당을 운영하는 신홍우 사장은 "이달부터 자체적으로 김치 대축제를 벌여 식당 매상이 사스 발생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다"고 밝혔다. 장사가 안돼 중국 식당들의 휴.폐업 사태가 잇따르는 것과 대조적이다.

서라벌의 경우 1천홍콩달러(약 16만원) 이상의 음식을 주문하는 손님에게 가격 할인과 함께 김치 세트(약 1.2㎏)를 선물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김치를 주면 '냄새 난다'고 외면하던 홍콩인들이 "주문 금액이 모자라지만 김치를 서비스해달라" "돈을 낼 테니 따로 싸달라"며 김치에 열광하고 있다.

지금까지 홍콩과 중국.동남아에서 한류(韓流)라고 하면 한국에서 만든 TV 드라마와 영화.대중음악을 지칭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사스 위기를 계기로 한국 음식을 찾고, 나아가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홍콩의 둥젠화(董建華)행정장관은 지난 12일 이면관(李勉官)한인상공회장을 만나 "감사합니다" "김치! 파이팅!"이라며 한국인들의 '홍콩 사랑'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홍콩 스타 켈리 찬도 "안녕하세요, 저는 진혜림입니다" "갈비가 맛있어요"를 또박또박 한국어로 말했다.

한류의 재점화 가능성은 태권도 시범 현장에서도 감지됐다. 수십명의 중.고생들이 몰려들어 격파 시범을 지켜보면서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어디서 배울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에 홍콩에 진출한 문태곤 문(文)태권도장 관장은 "사스를 계기로 도장을 찾는 홍콩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홍콩에선 요즘 한국에서 사스 감염자가 없다는 데 대해 부러움 섞인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홍콩의 아주주간(亞洲週刊)은 "중국과 아주 가깝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한국에서 사스 환자가 없는 것은 연구할 만한 일"이라며 "한국인들의 청결 의식, 담백한 음식문화, 언론 매체의 감시.경고 덕택"이라고 했다.

홍콩=이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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