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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여성 상권 ] 탈모 치료·숙취 해소·골프 클럽…남성 벽 깨진다

중앙일보

입력

#1. 박모(36·여)씨는 아침 저녁으로 여성 전용 탈모 치료제를 바르고 있다. 지난달 아침에 머리를 감고 빗질을 하다 휑해진 정수리를 발견해서다. 박씨는 “업무 스트레스와 과로가 겹친 탓인지 말로만 듣던 젊은 여성 탈모 증세가 나타나 당황했다"며 “회사의 여성 후배가 여성만을 위한 전용 탈모 치료제가 있다고 추천해 바르게 됐다"고 말했다.

#2. 직장인 박미선(28·여)씨는 지난달 친구들과 뮤지컬 '미스터쇼'를 관람했다. 19세 이상 여성만 입장할 수 있는 공연이다. '여성들이여, 욕망을 깨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잘생긴 근육질의 훈남 배우들이 노래와 춤으로 여심을 흔든다. 지난해 3월 시작된 공연은 8개 도시 투어를 성황리에 마쳤다. 객석 점유율이 90%를 넘을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박씨는 "낮 시간에 공연을 봤는데, 젊은 여성뿐 아니라 나이 든 주부도 많았다"고 말했다.

여성 상권(商圈)이 진화하고 있다. 남성 소비자를 겨냥했던 탈모 치료제·숙취해소 음료 같은 시장에 속속 여성 전용 제품이 나오고 있다. 여성만을 위한 복합 쇼핑 단지도 등장했다. 소비주권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이동하면서 업계가 여성들의 수요를 파악해 발 빠르게 움직인 결과다. 이에 따라 여성 상권이 '상품 구매'를 위한 단순한 물리적 공간에서 소비 심리 변화에 따른 개념적 공간으로 확대되고 있다.

여성들의 소비 심리 변화는 경제 구조의 변화가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2.6%(2013년)다. 20대 여성은 62.1%로 같은 연령대 남성(61.1%)보다 1%포인트 앞선다. 30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도 지난해 57%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여성이 소비 주체로 일어서면서 제품의 질보다는 감성과 분위기에 집중하는 것이 소비 심리의 특징이 됐다"고 분석했다. 여성만을 위한 감성이 배어 있는 제품에 지갑을 열고 있다는 뜻이다.

여성 전용 탈모치료제인 '엘 크라넬'을 판매하는 갈더마 코리아 관계자는"여성 탈모 환자가 증가하고 있지만 시중에 있는 제품은 대부분 남성 전용"이라며 "남성용을 여성이 바르면 성 호르몬 균형이 깨질 수 있어 여성용 제품 수요가 많았다"고 제품 출시 배경을 설명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09~2013년 여성 탈모 인구는 연평균 2.3% 늘어났다.

여성 전용 숙취해소 음료도 출시 1년 만에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에 지난해 12월 기준 숙취해소 음료 판매 순위 4, 5위에 컨디션 레이디, 모닝케어 레이디 등 여성이 새로 순위권에 진입했다. 외근과 회식이 잦은 직장인 유모(31ㆍ여)씨는 술자리에 가기 전 여성 전용 숙취해소 음료를 빼놓지 않고 마신다. 유씨는 “남자들이 주로 마시는 제품과 달리 포장에 핑크빛을 넣어 친근감이 들고 맛도 더 부드럽다"고 말했다.

남성 중심의 골프 시장도 최근 여성 골퍼에 주목하고 있다. 그간 여성 클럽은 남성용 제품을 갖고 스펙(크기와 무게)만 살짝 바꿔 출시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남성 제품명 뒤에 '레이디'라는 표시를 붙이는 식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제품 개발 단계부터 운동공학적 측면은 물론 색감·디자인 등을 종합 고려한 여성 전용 클럽이 나오고 있다. 한국미즈노는 3년간 공을 들여 여성 전용 클럽 브랜드인 ‘라루즈(프랑스어로 '붉은 색' '립스틱'이란 뜻)’를 지난 3일 선보였다.

기능뿐 아니라 스타일을 중시하는 여성 고객을 겨냥해 강렬한 붉은 색과 감각적인 디자인을 곁들인 제품이다. 미즈노 이수남 골프사업부장은 "제품 퍼포먼스는 물론 브랜드 이미지와 로열티 확대가 중요한 시점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지난해엔 캘러웨이·아디다스에서도 여성 전용 클럽을 론칭했다.

골프업계 관계자는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한국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등 저변이 확대되고 있지만 일반 골프시장에 여성 전용 클럽이 등장한 것은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골프의 본고장인 영국에서조차 브리티시오픈 골프대회 코스 10곳 중 3곳(로열 트룬·로열 세인트 조지·뮤어필드)은 남성 회원만 받는다. 그런 남성 중심 문화가 여전한 상황에서 여성 전용 제품의 등장이 시장 확대를 이끌 것이란 기대다.

'여성 전용 상품'을 한데 모은 복합단지는 '교류의 장'이기도 하다. 경기도 일산의 테마파크인 원마운트 2층에 있는 뷰티클러스터는 '여성만을 위한 놀이터'라는 콘셉트로 만들어졌다. 파마를 만 여성들이 커피를 마시며 정보를 교환하거나 성형외과 상담을 받는다. 성형외과·피트니스·피부미용·카페·스파·두피관리 센터 등이 한 곳에 모여 있다. 충북 청주에서 온 박서현(49·여)씨는 "한 번 오면 다섯 시간 이상 머문다. 여자들이 관심 있는 분야가 한 곳에 다 있어 트렌드 파악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트렌드가 점점 더 넓고 세분화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상헌 창업경영연구소 소장은 "여성에게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 클러스터 상권은 앞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희 한국창업전략연구소장은 "여성이 소비의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여성 지갑을 겨냥한 마케팅이 경영의 핵심이 될 것"이라며 "연령별 소비성향이 다른 여성의 특징을 공략하는 게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전용 상권에도 그늘은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여성 대부업체 신용 대출액은 5198억원(대출 건수 15만7900건)으로 나타났다. 2013년(1조691억원·31만3900건)에 이어 1조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여성 전용 대출은 케이블 TV를 통해 '조건없이' '남몰래' 등 자극적인 문구를 내세워 광고한다. 하지만 자칫 고금리로 빚더미에 빠질 위험이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전업주부 박모(41·여)씨는 지난해 10월 남편 몰래 500만원을 대출받았다. 연리가 무려 39%다.

상환 기간 2년에 매월 원리금 상환으로 28만원(이자 8만원)을 갚아 나간다. 소득이 없는 박씨에겐 큰 부담이었다. 결국 두 달치를 갚지 못하자 남편에게 돈 빌린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고 부부싸움으로 이어졌다. 박씨는 "광고를 보고 충동적으로 대출을 받은 게 화근이었다"며 "여성 전용 대출이라고 특별한 우대나 혜택도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장주영 기자, 송기승 인턴기자 jyj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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