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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들고 온셨던 수박 한덩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시골의 한 여학교에 재직할 때다. 고등학교 2학년 진반 수업중, 한창 수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교실문이 덜컥 열리며 낯선 할아버지 한분이 교실안으로 성큼 들어서는게 아닌가. 하얀 모시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단정히 쓴 할아버지. 백발수염이 탐스럽고 풍채가 좋으신 할아버지는 한쪽손에 단장을, 또다른 손에는 어른머리통 보다도 더큰 수박한덩이를 엮어들고 계셨다.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할아버지께 쏠렸다. 교실안으로 유유히 들어서신 할아버지는 우선 단장을 벽에다 턱 세우더니 수박을 맨앞 책상위에 올려놓은 다음 중절모를 벗어서 수박옆에 놓으신다. 그러고는 뚜벅뚜벅 내앞까지 걸어와서는 허리를 공손히 굽히며, 『아유 선상님, 수고하십니다. 제가 ○○할애비되는 사람입니다. 철부지년을 갖다 매끼고 진작 찾아뵙지도 못하고…이거 영 사람노릇도 못하고…용서하십쇼…』하시며 연신 허리를 굽히는게 아닌가!
나는 할아버지를 복도로라도 모실양으로 손을 잡고 인도하였다.
할아버지는 행여 짐승을 갖다 맡겼기로서니 그렇게 무심할수가 있느냐며 죄송하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는것이었다.
마음만은 그렇지 않은데 시골이라 아무것도 없고, 오늘 마침 집에서 가꾼 수박 첫물을 따는 날이라 열일 제치고 선생님 목이나 축이시라고 한덩이 소중히 들고 왔으니 허물일랑 말라는것이었다.
어려운 현실에 처할때마다, 따분하다는 교직에 회의가 일때마다, 자신을 잃고 방황할때마다. 문득문득 그때 그 할아버지의 꾸밈없이 순수하기만 하던 모습과 그 수박의 시원하던 맛이 생각나는것은 무슨까닭일까. 그때의 감동이 너무 컸기때문일까, 아니면 인정이 너무나도 메말라버린 현실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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