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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 거짓말 그리고 스캔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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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 도둑과 사기꾼

1991년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니제르 대사관에 도둑이 들었다. '니제르 공화국'이란 도장이 찍힌 공문서 용지만 잔뜩 없어졌다. 종이 도난 사건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10년 뒤 로코라는 인물이 로마의 미국 중앙정보국(CIA) 사무실에 나타났다. 니제르가 이라크에 우라늄을 수출하는 비밀계획을 잔뜩 적어놓은 공문서를 내놓았다. CIA는 '엉터리'라며 무시했다. 정보 장사꾼 로코는 이를 이탈리아 정보기관에 팔았다. 이탈리아 정보기관은 이를 정리해 CIA에 제공했다. CIA는 로코와 무관한 정보인 줄 알고 본국에 보고했다.

보고서는 2002년 2월 이라크 전쟁을 준비 중이던 딕 체니 부통령에게 전달됐다. CIA에 '추가 확인'을 지시했다. CIA 비밀요원 발레리가 자신의 남편 윌슨을 니제르에 파견하자고 건의했다. 전직 외교관 윌슨은 니제르의 총리와 자원부 장관을 잘 알았다. 윌슨은 현장 확인을 마치고 돌아와 "가짜 문서"라고 보고했다.

2. 오만과 편견

평상시라면 해프닝으로 끝났을 일이다. 그러나 당시는 테러와의 전쟁 차원에서 이라크 전쟁이 추진되던 상황이었다. 체니는 전쟁의 입안자다. 전쟁의 명분은 크게 두 가지. 첫째,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MD)를 가지고 있다. 둘째, 후세인이 알카에다와 연관돼 있다. 그래서 후세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대량살상무기 테러를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됐다.

우라늄 얘기는 첫째 명분에 딱 맞다. 윌슨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가 아프리카에서 우라늄을 사들인다는 정보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미 전쟁을 결심한 백악관은 엉터리 첩보를 전쟁 정당화의 명분으로 활용했다. 백악관의 네오콘들은 오히려 '엉터리 첩보'라고 주장하는 CIA를 전쟁에 비협조적인 무능한 조직이라고 비난했다. 전쟁으로 몰아가기 위해 정보를 왜곡하는 편견, 정상적인 의사결정을 무시하는 오만이다.

답답해진 윌슨이 2003년 7월 6일 "니제르가 우라늄을 팔았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라는 글을 뉴욕 타임스에 기고했다. 백악관 네오콘들이 발끈해 윌슨을 뒷조사했다. 윌슨의 부인(발레리)이 CIA 비밀요원임을 알았다. 루이스 리비 부통령 비서실장이 가까운 언론인들에게 이 사실을 흘렸다. 14일 발레리 신원이 언론에 처음 공개됐다.

3. 거짓말과 스캔들

비밀요원 신상공개는 불법이다. CIA가 법무부에 '공식조사 필요성'을 건의했다. FBI가 나섰다. 이때부터 거짓말이 시작됐다. 백악관은 "전혀 무관"이라며 발을 뺐다. 위증죄로 기소된 리비는 FBI의 조사에서 "발레리가 CIA 요원이라는 사실을 언론인에게 처음 들었다"고 거짓말했다. 그는 특별검사에게도 같은 거짓말을 반복하는 바람에 다섯 가지 혐의로 기소됐다. 특별검사는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개 재판이 시작되면 스캔들의 몸통이 드러날 것이다.

도둑질에서 시작돼 정치 스캔들로 비화했다는 점에서 리크 게이트가 워터 게이트를 닮았다는 얘기도 나온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은 "워터 게이트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했다. 도둑과 사기꾼은 어디에나 있다. 문제는 정치인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거짓말이다. 거기엔 수만 명의 목숨이 걸릴 수 있다.

오병상 국제뉴스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