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36년 <24>|3·1 운동(7)|발굴자료와 새 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 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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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3·1운동은 무단통치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저항은 전국에 걸쳐 끈기 있게 계속되어 일본을 당황하게했다. 반사행동은 무자비한 탄압이었다. 1919년 이 땅을 피로 물들인 학살과 고문과 형벌의 사례는 끝이 없다.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도처에서 만행이 저질러졌지만 그 어느 것도 총독부고위당국은 통제할 의도를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장 잔인한 수원학살사건에 대한 일본군의 처리기록이 증거로 남아있다.
수원의 제암리 인근 3개 부락 주민의 학살은 4월15일에 일어났다.
중위 「아리따」 (유전전부)가 인솔한 일본군이 이곳 3개 부락의 기독교 및 천도교도 30여명을 제암리교회당에 모아놓고 밖에서 총을 난사한 사건이다. 한 부인은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창 밖으로 내밀었으나 일본법정은 그 아기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렇듯 무자비한 학살이었다. 그들은 만행의 흔적을 지우느라 불을 질려 한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랬음에도 처벌은 하지 않았다.
학살자 처벌 안해
○…일본군경의 야만적 진압은 광범한 체포와 고문으로 이어졌다. 고문은 말할 수 없이 가혹했다. 그들은 마구 잡아다 10일 이상 조사라는 이름의 보복고문을 하고 그 일부만을 재판에 회부했다. 일본의 기록은 그해 10월까지 1만9천여명을 재판에 회부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니까 10만 가까운 사람들이 끌려가 모진 고문에 더러는 불구가 되거나 숨지기도 했다.
민족대표중 태화관에 모였던 29명은 함께 체포되었으며 참석이 늦어진 3인은 자진출두했다. 단 한 사람 김병작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경찰은 서명자는 아니지만 거사준비에서 중심역을 한 송진우 함태영 현상윤 최남선 그리고 학생대표 김원벽 강기덕 등 16명도 민족대표와 동일범으로 보아 한 묶음으로 취급했다. 취조는 진척이 빨랐다.
거사 준비 때 심문에 대비하자는 말이 나왔는데 최린이 『떳떳한 일을 하는 우리가 무엇을 감출 일이 있겠소. 그들이 묻거든 아는 대로 털어놓읍시다』고 했던 양해사항에 따라 모두가 감춤이 없었던 것 같다.
3월에 검찰조서가 끝나고 4월초엔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넘겨졌다. 예심검사는 「나가시마」(영도웅장)로 4개월에 걸쳐 무려 14만장의 방대한 조서가 만들어졌다.
일본당국은 내란죄로 몰고 가려했다. 내란죄로 하면 단심으로 (일본에선 대심원, 조선에선 고등법원) 마무리 할 수 있고 형량도 사형 또는 무기가 가능했다. 이 때문에 민족대표들은 경찰→경무총감부→검찰부→경성지방법원 예심계→고등법원예심판사를 거치며 16개월 동안 똑같은 심문을 되풀이해 당했다.
○…민족대표들은 심문에 의연한 자세를 지켰다. 손병희는 조선독립을 확신한다고 했다.

<문>피고는 일로전쟁 때 인부를 동원, 일본을 원조한 일이 있잖은가?

<답>그렇다. 노일전쟁 당시 내가 일본에 있을 때 군자금 1만엔을 헌납한 일이 있다. 그것은 일본이 패망하면 동양은 파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경의·경부선을 놓을 때 천도교에서 사람을 동원, 원조했다.

<문>일한병합에 대해선 어떤 감상을 가졌는가?

<답>나는 별로 찬성도 불찬성도 아니했고 교도들에겐 말을 조심하라고 했다. …(중략)

<문>이번 독립선언의 동기는 무엇인가?

<답>그 일은 이전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고, 지금 파리에서 열리고있는 강화회의에서 미국대통령이 민족자결을 주창했다는 말을 듣고 앞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라 생각했고 민심을 탐지한바, 조선도 독립이 될 희망을 가지고 일본정부에 그 취지를 건의하고 대사를 선언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예수교 측에서도 그런 계획이 있어 쌍방이 합류한 것이다.
검찰조서 14만장

<문>피고는 과거 일한병합에 반대하지 않았으면서 왜 이제 와서 독립을 부르짖는가?

<답> 한일합방 때 칙어에는 「일친동인」이라 했는데 합병 후 조선인은 항상 압박을 받았다. 그 한 예로 나는 관청에 아무런 상관없이 구속을 당하고 있었다. 또 요새 와선 천도교당 건축에 필요한 기부금모집조차 당국은 금지하고있다.

<문>피고는 정부에 대해 다른 불평을 가지고 있는가?

<답>………나는 합병 뒤로는 정치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신도들에게도 그저 관령을 복종하라고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나를 배일당으로 지목해왔다.……지금 같은 방침이라면 일본은 도저히 조선사람을 동화시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또 나는 동양에 수다한 국가를 세워둠으로부터 동양전체를 일원으로 한 집안 같이 단결하여 지식이 높은 자를 주권자로 하지 않으면 서양의 세력을 당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공약삼장 중의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이란 대목을 내란 혐의에 맞추려는 외도도 보였다.

<문>요컨대 이 취지는 최후의 한사람까지 끝까지 일본정부에 반항하라는 것이니, 이는 조선민족 전체가 분기할 것을 재촉하는 것이 아닌가?

<답>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민족 모두가 최후의 1인까지 독립의사를 가지고 그를 표시하라는 뜻이다. 지금 각처에 일어났다고 하는 폭동에 대해서는 사전에 조금도 얘기한바 없다.
보성학교 교장으로 3·1운동의 산파역을 맡았던 최린은 독립선언의 목적을 첫째 조선민족의 생존권율 확장하는 것, 둘째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 뉘우치게 하는 것, 세째 현하 세계평화를 주장하는 열국의 동정을 얻는 것이었다고 했다.

<문>피고는 왜 조선이 독립돼야 한다고 생각했는가?

<답>조선이 병합될 당시 나는 병합이 일로전쟁의 당연한 결과로 부득이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병합 후 10년간 일본은 입으로 선정·동화를 부르짖었지만 실제는 달랐다.
경제적으로 이일본·해조선이요, 정치적으로 귀일본·천조선이며, 나라를 판 매국노에겐 작위와 영예를 주는 등 대우함으로써 조선인의 선량한 감정을 해치고 있다.

<문>그러면 총독정치의 개선을 요구하지 않고 왜 굳이 독립을 요구했는가?

<답>지금까지 정치의 개선을 요구해도 실행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차라리 이번에 조선은 일본과 멀어져 독립하고, 독립함으로써 일본과 제휴해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구한국시대 고위군인출신으로 일찌기 개화당으로 활약하다 손병희와 제휴, 전도교내 실력자가 됐던 권동진은 한일합 자체가 『시기를 오인하고 정책을 상실한 것』이며 병합 후 10년간 조선은 가정에 시달려 『조선인중 10중 8, 9는 다 죽을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고 주장했다.
"이 일본 해 조선뿐"

<문>피고는 일한병합에 반대하는가?

<답>물론 반대한다.

<문>피고는 금후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그렇다. 독립이 될 때까진 어떻게 하든지 할 것이다. 지금 당장 독립이 안된다 해도 지금의 뜻을 가지고 씨를 심어놓으면 장래 기필코 열매가 열게 되리라고 생각한다.…여하간 우리는 일본과는 다튼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독립을 해야만 행복한 생활을 하리라 생각할 뿐이다.
기독교 측 거사책임자였던 이승훈은 자신은 한일합병이래 언론·출판·교육 등 자유를 피탈당해 큰 불만을 가져오던터에 『이번에 천제가 행복을 주시는 시기를 맞이하여 천하일반의 사람이 같이 생을 도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고 했다.

<문>피고는 독립운동을 하면 실제 독립이 되리라 생각하는가?

<답>미국대통령이 선언한 14개 조항에 민족자결원칙이 주창되고있고, 현하 세계대세는 민족평등을 지향하고 있지 않는가? 조선이 비록 힘이 없으나, 힘이 없는 자도 힘이 없는 자로서 자유독립의 취급을 받을 시대가 왔다고 생각한다.
불교대표 한용운도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문>독립선언서를 배포한 목적은?

<답>그것은 세계전반에 조선이 독립한다는 것을 알리자는 것이다.

<문>이런 선언서를 배포하면 어떤 결과가 오리라 생각했는가?

<답>조선은 독립이 될 것이고 인민은 장차 독립국 국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문>피고는 이번 계획으로 처벌될 줄 알았는가?

<답>나는 내 나라를 세우는데 힘을 다한 것이니 벌을 받을 까닭이 없다.

<문>피고는 금후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그렇다. 언제든지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양한묵, 옥중 별세
○…하뇽운은 내 목숨은 이젠 이 나라 이 땅 이 백성에게 바쳤다고 했다. 그는 감옥에서 3개항의 실천원칙①변호사를 선임 않는다②사식을 먹지 않는다.③보석신청은 않는다를 스스로 정해 지켰다. 심문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일본당국은 사형도 가능한 내란죄 적용으로 기울고 있었다. 어쨋든 관계관은 으례껏 내란죄로 다스릴 것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이 때문에 민족대표중 일부가 겁에 질려 흔들렸다. 이 나약함을 본 한용운은 견디다못해 어느 날 아침 변기통을 그들에 뒤집어씌우며 『이 천하에 더러운 놈들아. 너희들이 소위 민족대표 한다는 놈들이냐. 이×물도 아깝다』라고 분노의 감정을 쏟아놓기도 했다.
그해 여름 한용운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옥중답변서도 썼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고로 자유가 무한 인은 사해와 동하고. 평화가 무한 자는 최고병의 자라…』로 시작되는 또 하나의 독립선언서다.
○…민족대표들은 내란죄혐의로 고법에 계류돼있었으나 일본당국이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최종방침을 정함에 따라 다시 경성지법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그들에게 내란죄대신 보안법 및 출판법위반이 적용됐다.
그랬지만 지법과 고법을 내왕하느라 1년 반이 넘는 기간을 심문에 시달려 양한묵은 옥중에서 별세했고 손병희는 뇌일혈로 쓰러졌다. 그들에 대한 판결은 3년에서 l년6개월, 그러니까 시위행동의 주동역을 한 젊은 학생들보다 낮은 징역형이 선고된 것이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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