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졸속·청부 입법 … 447개 법조항 위헌 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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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법 제52조에는 ‘부양가족연금’ 제도가 규정돼 있다. 재산이 100억원이든, 월 소득이 1000만원이든 관계없이 60세 이상 부모와 배우자, 18세 미만 자녀가 동거한다면 매월 추가 연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해당 조항에 따른 연금 지급액은 연간 4500억원에 달한다. 반면 연금을 받고 있는 수급자와 18세 이상 자녀는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 조항은 과연 평등 원칙에 맞는 것일까.

 국민연금법처럼 국민의 실생활과 밀접한 현행 법률 가운데 위헌적 조항이 447건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가 8일 공개됐다. 법제처가 2012~2014년 한국법제연구원에 위탁한 ‘법령의 헌법합치성 제고를 위한 정비 방안’ 연구에서다. 기업·복지·세제·교육 등 12개 분야 814개 법률을 검토한 결과 약 200개 법률에서 447개 위헌적 조항이 발견됐다. 헌법재판소 판례에 따라 위헌성 높은 조항을 추려낸 결과 조사 대상 법률 세 건당 한 건에서 악법 조항을 찾아낸 것이다.

 법제연구원은 국민연금법 52조에 대해 “소득·재산이 많은 이들에 대한 구분 없이 동거자에게 부양가족연금을 추가 지급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며 “소득과 재산이 일정 기준 이상일 때는 수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게 헌법 원칙에 맞다”고 지적했다. 민법 친양자제도(908조)가 ‘3년 이상 혼인한 부부’만 친양자를 입양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대해서도 독신자의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을 침해한 것으로 봤다. 대통령의 특별사면(사면법 3조) 역시 위헌 조항으로 꼽혔다. “국회의 통제 절차가 없는 특별사면은 법치주의를 왜곡하고 특별사면 대상이 되지 않는 일반 국민을 자의적으로 차별하는 등 중대한 평등권 침해를 야기한다”는 이유에서다. 개별소비세법·주세법 등 각종 세법들이 면세 대상을 대통령령에 포괄적으로 위임한 것도 위헌적 조항으로 지적됐다.

 이처럼 위헌적 법률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국회 입법 시스템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본회의 회부 직전 ‘게이트 키퍼’ 역할을 하는 법제사법위원들은 “여야가 합의한 경우 위헌적 법안이라도 법사위 차원에서 막기 힘들다”고 말했다. 본회의 일정에 맞춰 많을 땐 하루 100여 건씩 처리하다 보니 충실한 심의는 불가능에 가깝다.

법제처장을 지낸 한 변호사는 “심사 과정이 졸속인 데다 평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입법 로비 등 ‘청부입법’의 폐단까지 나타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홍완식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국회에서 걸러지도록 법률가를 배치해 심사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정효식·박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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