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석의 걷다보면]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 - 카메라와 함께 걷는 법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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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인연으로 사진반 수업을 진행한 지 꽤 오래되었다. ‘길 위의 사진가’라는 과분한 이름까지 달고 활동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걷는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길과 사진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는 김에,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서는 분들께 평소 드리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려 드린다.

1. 걷는 일 자체를 즐겨라
걸으면서 꼭 사진을 찍어야 하는 건 아니다. 사진을 찍기 위한 행동이 오히려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을 어떻게 찍을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길을 걷는 것 자체에 집중해보자. 그러면 보는 것, 느끼는 것이 달라진다.
카미노를 걸을 때, 풀이 있는 곳이면 여유 있게 누워 있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즐기니까 가능한 풍경이다. 즐긴다는 것은 자신의 호흡과 템포에 맞게 걷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무리한 목표를 정하지 말고, 가능한 한 천천히, 혼자보다는 다른 사람과 같이, 충분히 많이 먹고 웃으며 걸었으면 좋겠다. 땅에 누워도 보고, 하늘도 쳐다보고, 풀도 보고, 나뭇잎의 색깔도 보고, 지나가는 개미 길도 보고, 흐르는 냇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그렇게 길 자체를 느끼며 걸으면 좋겠다.

2. 내 몸에 맞는 카메라를 선택해라
기타를 들고 걸으며 노래를 부를 수도 있고, 스케치북을 들고 걸으며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사진을 찍는 것도 그렇게 길을 즐기는 일 중의 하나다. 걸으며 뭔가를 남기는 게 좋아서 사진을 선택했다면 카메라도 무리할 이유가 없다. 내 몸에 맞는 카메라를 들고 걷자. 무거운 DSLR은 자칫 목이나 무릎, 어깨에 무리만 줄 수 있다. 카메라를 드는 게 고통스럽다면 카메라를 들지 않는 게 낫다. 핸드폰으로도 얼마든지 찍을 수 있다.

3. 보이는 걸 찍어라
무엇을 찍어야 할까? 사진을 처음 찍는 사람의 99.9%가 묻는 질문이다. 서울 인사동 하면 ‘전통’이 먼저 떠오르듯이, 어딘가로 출사를 가면 그곳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이미지만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워낙 많은 시각자료에 둘러싸여 살다 보니 시각적 선입견이랄까, 고정관념이 형성된다. 그 이미지대로만 찍으려고 하니까 찍을 게 없어지고 만다.
길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아름답게 이어지는 길이 있고, 거기서 사람들이 활짝 웃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뭘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 싶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그 공간에서 뭘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거다. 다른 사람도 같은 행동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한번 둘러보라.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는 보이는 것을 찍자. 사진을 찍고는 이러쿵저러쿵 평가하지 말자. 찍을 때 행복했고, 봤을 때 즐거웠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보이는 대로 찍는 것이 좋은 사진이다. 찍는 이가 행복한 것이 가장 좋은 사진이다.

4. 오감을 열고 두리번거려라
관심이 있으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자연에 대해,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걸어보자. 꽃 한 송이도 걷는 시간대와 보는 방향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유심히 관찰하면 훨씬 더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가끔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내가 무엇을 밟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도 해보자. 그렇게 마음과 몸을 열어놓고 걸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찍히게 된다. 내가 보는 만큼, 관심 있는 만큼 찍게 되는 것이 사진이다.

5. 배경을 먼저 보라
걸으면서 사진을 찍을 때는 배경을 먼저 보는 것이 좋다. 지금 창가에 있다고 해보자. 그냥 창문만 찍으면 재미가 없다. 그런데 저기에 비둘기 한 마리가 파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간다고 쳐보자. 그 순간을 포착하면 사진이 훨씬 더 풍성해진다.

길도 마찬가지다. 배경을 먼저 보면 그 배경 안에 사람이 들어올 때 어떤 느낌일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길을 걷는다는 느낌을 더 생생하게 담을 수 있다.
사람이 없으면 풍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풍경이 없으면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은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인물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도, 풍경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풍경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6. 상상으로 미리 걸어보라
길을 떠나기 전에 먼저 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길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보는 거다. 누군가 길을 걷는다, 누군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다, 누군가 물을 마신다, 누군가 힘겨워한다, 누군가 울고 있다, 웃고 있다. 어떻게 보면 촬영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다. 그리곤 실제로 걸으며 그대로 찍어보는 거다.

걷고 난 저녁에는 그날 찍은 사진을 처음부터 되돌려보자. 그러면 걷던 당시의 감정이 다시 살아난다. 마음으로 한 번 더 그 길을 걸어보는 거다. 말하자면 촬영 계획을 세우고 리뷰를 하는 셈이지만, 촬영의 잘잘못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내가 걸어왔던 길을 더 잘 보고, 그 길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만약에 1주일을 걷는다고 하면, 첫날의 촬영 계획에는 선입견이 만든 이미지가 가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둘째 날에는 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깨어지고, 첫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층 생생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셋째, 넷째 날쯤 되면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좀 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촬영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가기 전에 먼저 걸어보고, 실제로 걷고, 그런 뒤에 마음으로 또 걸어보자.

그것이 카메라와 함께 길을 걷는 최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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