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자! 이제는] 21. 경품·할인 미끼로 또 과열 마케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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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카드는 술 장사와 같다. 팔기는 쉽지만 판매 대금을 제대로 회수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국내 모 그룹 회장은 2002년 카드사 경쟁이 치열할 때 계열 카드사 사장에게 이처럼 충고했다. 예부터 술 장사는 신용을 바탕으로 외상을 많이 줘야 매출이 늘고 번성했다. 그러나 이는 곧 망하는 지름길이기도 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경고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카드사들은 '길거리''묻지마' 회원 모집으로 외형 경쟁에 몰두하다 결국 카드 대란을 맞았다. 금융시장은 수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올 들어서야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최근 파격적 이벤트와 미끼 서비스가 쏟아져 나오면서 카드 대란을 불렀던 과열 마케팅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카드 모집인도 다시 늘어 카드 대란 당시 수준으로 증가했다. KB카드는 하반기 총력 마케팅에 나서 연말까지 건당 10만원 이상 KB카드로 할부 또는 현금서비스를 이용한 고객 89명에게 1억원을 나눠주기로 했다. 현대카드는 9월부터 새로운 카드론인 '세이브론'을 출시해 우량 고객에 대해 최초 3개월간 연 7.9%의 금리를 적용, 기존보다 2%포인트 정도 낮춰주고 있다. 은행권의 신용대출 금리와 맞먹는 파격적인 수준이다.

신한카드는 연말까지 이지카드론 금리를 20% 할인해 연 9.8~17.4%를 적용하는 특별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삼성카드는 1등 100만원 상당의 경품을 내걸고 '내 생애 첫카드' 등 다양한 경품 행사를 벌이고 있다. 롯데카드는 최근 현금서비스를 두 번 이용하는 고객을 추첨해 최대 100만원의 현금 캐시백을 지급하고 취급수수료를 물리지 않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카드사 관계자는 "카드사들이 지난해까지 부실자산을 털어냈으니 이젠 자산을 회복하기 위해 어느 정도 공격적인 마케팅이 불가피하다"며 "요즘 이벤트는 실적이 있는 회원을 대상으로 한 타깃 마케팅"이라고 말했다.

이런 판촉에 힘입어 지난달까지 누적 신용판매 매출액은 138조7470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6.1% 증가했다.

그러나 서비스 차별화 없이 경품과 이벤트에 의존한 이런 외형 성장은 한계를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올 들어 연체율이 줄고 신용판매가 늘면서 카드업계가 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지 않는 한 실속이 없다는 얘기다.

금융연구원 정찬우 연구위원은 "카드사 간 고객유치 경쟁은 무이자 할부서비스 등으로 인해 수익성 개선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전업계 카드사 연체율은 여전히 8% 안팎에 달해 정상적인 상황이었던 2001년 말(2.5%)의 세배를 웃돌고 있다. 가계가 여전히 부채에 허덕이고 있는 데다 실질소득도 올 들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데 외상 구매만 늘고 있는 것이다.

고객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늘고 있다. 업무 특성상 여러 은행을 거래하고 있는 자영업자 김모(37)씨는 "은행 지점에 갈 때마다 신용카드 가입을 권유받아 불편하고 짜증난다"며 "가입 자격을 엄정히 심사해야 할 카드회사들이 회원 가입을 강권하고, 외상 구매를 조장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김동호.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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