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즐겨읽기] 질긴 놈 불안! 한 방 먹여 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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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얼굴이 뭉개진 채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에드바르 뭉크의 '불안'. 영국의 대중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의 숙명적 질환인 불안의 원인을 신분·지위에 대한 집착에서 찾고 있다.

불안(원제 Status Anxiety)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이레, 400쪽, 1만3000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표현도 많이 쓴다. 어찌 보면 인간사는 긴 자리다툼이다. 존재 상황이 이러니 우리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대해 늘 불안해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더 높이 오르지 못해서, 더 많이 갖지 못해서 슬픈 짐승이 인간이다. 불안은 인간의 숙명이고, 욕망의 하녀며, 살아남게 밀어주는 힘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고 풀어버리는 것이 낫다.

영국의 대중 철학자이자 문장가인 알랭 드 보통(36.www.alaindebotton.com)은 2000년 인간사가 보여주는 불안의 유산을 파고든다. '우리는 왜 불안한가'를 묻고 답하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부터 마르셀 뒤샹의 미술작품 '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까지 끌어온다. 연애의 본질을 우아하게 해부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그랬듯, 불안을 발가벗기는 솜씨가 섬세하고 유쾌하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으뜸 원인은 '사랑 결핍'이다. 돈.명성.영향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기보다 사랑의 상징이자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더 중요하다. 세상이 베풀지 않는 사랑에 목말라 망가지는 인생이 많다. '속물근성' 또한 말릴 수 없는 불안의 뿌리다. 드 보통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냉담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라고 정의한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바랄 수밖에 없이 돌아가는 자본주의의 '기대',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얹어주는 능력주의,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현대 사회의 불확실성도 우리의 불안을 끈질기게 들쑤신다. 평생 불안을 안고 살더라도 좀 누그러뜨리며 가자는 지은이의 비법은 꽤 고상하다. 서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철학.예술.정치.기독교.보헤미아 다섯 가지다.

그는 우선 "상자를 하나 떠올리면 좋을 것"이라고 권한다. 뭐든 먼저 이 상자에 던져놓고 평가하면 불안을 눅일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 상자를 '이성'이라고 부른다. 지적인 염세주의도 도움이 된다.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라고 냉소하면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갈파했다.

예술에 빠지는 것도 좋다. 소설 한 편, 그림 한 점이 세상에서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속물적 관념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라는 정치적 이해나,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는 기독교식 상상이 불안한 마음을 무디게 해줄 수 있다. 집시처럼 자유롭게 사는 보헤미아도 한 방법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구스타프 플로베르는 "부르주아지를 증오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했으니, 부르주아지의 반대편에 서서 놀고 사랑했던 집시의 삶은 우리의 꿈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무정한 '현금'외에 다른 아무런 유대도 남기지 않은" 이 시대에 불안을 곰곰 생각해보는 것 자체가 불안을 이기는 길이라고 드 보통은 슬며시 찌른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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