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6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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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장기영은 맨손으로 한국일보를 일구어냈다는데 편집부 바로 위층에 군대 야전침대를 갖다놓고 군용 담요를 깔고 덮고 자면서 일선기자들과 야근도 함께했다고 한다. 편집부로 올라가는 계단 층계참마다 '뛰면서 생각하자'라든가 무언가 열정적인 표어 비슷한 글들을 적어 놓았다. 당시의 한국일보는 스스로 젊고 새로운 신문이라고 주창하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더니 내가 써낸 '줄거리'를 보았는지 대뜸 이렇게 시작했다.

-의적이란 게 말이야, 그게 험한 세상살이에 속풀이를 해주거든. 이눔 저눔 사정없이 혼내주고 지 맘대루 써야지.

-요새 검열 심한데 회장님 책임지시겠어요?

-반정부 하게?

-도둑이 부자들 족치구 왕조에 대들지요.

-괜찮아 괜찮아, 너무 쎄게는 하지 말구 잡혀가면 내가 싹싹 빌구 꺼내주께. 왜정 때 조선일보에 벽초 선생이 임꺽정 쓸 때에 말이지, 아, 이 양반이 어찌나 펑크를 잘 내던지 소설 안 실린 날에는 화장실에다 찢어버리고 총독부 실컷 욕하구 그랬다니까. 거 역사소설이란 게 시언하구 구수하게 써야지. 그래야 남녀노소가 다 좋아하구 그럴 테지.

하고는 그가 후회할 말을 내놓고야 말았다.

-내가 젊어서 이능화 선생을 좋아했는데 이분이 신학문도 아시고 정말 옛날 전적을 모르는 것이 없어. 모시고 몇 번 술자리도 대접한 적이 있는데. 저 '해어화사(解語花史)'라구 보았나? 기생이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거여. 우리 조풍연 선생이 그분 따라갈려구 하는데 작가는 무엇보다 자료를 많이 봐야 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말했다.

-그러니 자료비를 미리 좀 많이 주시지요.

옆에서 듣고 앉았던 부장은 다리로 나를 건드리며 주의를 주었지만 모른척했다.

-일 년 안에 독자들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제가 다 물어내지요.

그 말에 장기영은 얼굴이 벌게지도록 웃었다.

-자료비라, 그거 미처 생각 못했는데… 얼마나 줄까?

-저는 아직 젊고 가난한 작가니까 국민주택 한 채라야 얼마 안 됩니다. 서가에 책이 가득해야 좋은 글이 나오겠지요.

장기영은 그때부터 껄껄대며 웃기 시작했다.

- 좋소, 좋아요. 집 한 채는 소설 써서 지가 알아서 하고, 나는 서재를 책으로 가득 채울 만큼 내지.

그 자리에서 비서실장을 시켜 수표를 끊어 내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누구 말마따나 생각했던 것보다는 공 하나가 더 있었다. 과장해서 집 반 채 값 정도는 되었으리라. 내달부터 당장에 시작하자는 것을 나는 육 개월 뒤로 미루고 사주는 그것을 절반 뚝 잘라서 삼 개월로 줄였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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