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를 흔든 시 한 줄

장사익 음악인

중앙일보

입력 2015.01.28 00:05

업데이트 2015.01.28 00:23

지면보기

종합 28면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1915~2000) ‘신부’ 중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막판의 반전
높은 산, 넓은 바다 같은 시 세계

소설가 조정래, 시인 김초혜 선생님 부부를 뵐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조 선생님이 한 10분 동안 말씀하시면 김 선생님이 ‘아, 그게 한마디로 이거 아녜요’라고 정리를 한다. 그럴 때 이게 소설가와 시인의 차이구나 느끼곤 한다. 함축적으로 세상을 한 방에 휘어잡는 깊고 넓은 세계가 바로 시인 것이다.

 서정주 시인의 모든 시, 특히 ‘신부’가 그렇다. 처음엔 그냥 심심한 옛 얘기를 듣는 것 같다가 마지막 반전에 감정이 휘몰아친다. 첫날밤 신랑의 오해, 40~50년의 일편단심, 그 오랜 원망과 기다림을 ‘재로 폭삭 내려앉았다’고 한순간에 풀어버리는 반전.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판소리로 치면 감정을 한껏 고조시켜 가다가 중간에 상황을 풀어 설명해주는 아니리 같은 느낌이다.

 생전의 시인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돌아가신 직후 그의 시 ‘황혼길’을 노래로 불러 취입한 적이 있다. 죽으러 가는 길을 시집간 딸을 만나러 마실 가는 길에 빗댔다. 얼마나 먹먹하고 슬픈지. 한때 시인은 과거의 과오로 외면받기도 했지만 그의 시는 그 자체로 높은 산, 넓은 바다다. 시의 나라, 시의 교과서란 표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거미가 뿡뿡 줄을 뽑아 집을 짓듯이 술술 몸에서 나온 언어들이 아름다운 시가 됐다.

장사익 음악인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