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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장사익 음악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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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1915~2000) ‘신부’ 중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막판의 반전
높은 산, 넓은 바다 같은 시 세계

소설가 조정래, 시인 김초혜 선생님 부부를 뵐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조 선생님이 한 10분 동안 말씀하시면 김 선생님이 ‘아, 그게 한마디로 이거 아녜요’라고 정리를 한다. 그럴 때 이게 소설가와 시인의 차이구나 느끼곤 한다. 함축적으로 세상을 한 방에 휘어잡는 깊고 넓은 세계가 바로 시인 것이다.

 서정주 시인의 모든 시, 특히 ‘신부’가 그렇다. 처음엔 그냥 심심한 옛 얘기를 듣는 것 같다가 마지막 반전에 감정이 휘몰아친다. 첫날밤 신랑의 오해, 40~50년의 일편단심, 그 오랜 원망과 기다림을 ‘재로 폭삭 내려앉았다’고 한순간에 풀어버리는 반전.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판소리로 치면 감정을 한껏 고조시켜 가다가 중간에 상황을 풀어 설명해주는 아니리 같은 느낌이다.

 생전의 시인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돌아가신 직후 그의 시 ‘황혼길’을 노래로 불러 취입한 적이 있다. 죽으러 가는 길을 시집간 딸을 만나러 마실 가는 길에 빗댔다. 얼마나 먹먹하고 슬픈지. 한때 시인은 과거의 과오로 외면받기도 했지만 그의 시는 그 자체로 높은 산, 넓은 바다다. 시의 나라, 시의 교과서란 표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거미가 뿡뿡 줄을 뽑아 집을 짓듯이 술술 몸에서 나온 언어들이 아름다운 시가 됐다.

장사익 음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