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택수 1OC위원을 추모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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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70년대 한국 스포츠계의 거목이요, 대부와도같던 인물이 가셨다. 김택수IOC위원.향년 57세. 너무도 일찍 돌아가셨다. 그분이 스포츠계에 남긴 발자취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아직도 한참 일할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신것이 더욱 가슴을 저리게한다.
71년부터 79년까지 나는 대한체육회장직을 맡은 그분의 곁에서 고락을 함께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릉선수촌의 잔디언덕에 앉아 훈련중인 선수들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그분의 환상이 마치 현실같이 느껴진다.
그만큼 그분의 개성과 체취는 강렬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의 그분에 관해선 잘 모른다.
그러나 한국체육의 총수로서 그 분의 일거수일투족을 볼때 큰 그릇의 정치인임을 능히 짐작할수 있었다. 국산. 그의 아호다. 들과 산에 절로 피어난 국화를 그분은 무척 사랑했다. 『들국화는 어떤 설한풍에도 꺾이지 않는다.』 그의 강인한 성품을 잘 드려낸 이 말을 자주했다.
그리고 호랑이를 좋아했다. 당신의 얼굴생김이 호상인탓도 있지만 그분은 포효하며 비상하는 호랑이의힘찬 모습을 항상 얘기했다.
『호랑이가 오랜 침묵을 깨고 하늘을 으깰듯이 대지를 박차고 뛰어오르는 모습은 힘과 의지와 승리의 상징이다』 여기서 삶의 활력을 얻으라는 것이 즐겨 측근들에게 얘기하는 충고였다.
76년 몬트리올올림픽때 여자배구가 동메달을 따내자그 분은 눈물을 글썽이며감격했다.
스포츠를 사람하는 마음은 지극했다.그리고 체육립국의 짐념은 불같이 뜨거웠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출전했을땐 한국선수단의 성적에 신경을 써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기 일쑤였다. 『대회때마다 10년은 감수한다』웃으면서 하는 말이었지만 연민의 정을 금할수 없었다.
뮌헨올림픽을 몇달 앞두고 어느날 자정이 넘어 갑자기 원주까지 달려간적이었었다. 4년전 멕시코올림픽에서 은메달에 그친 복싱의 지룡주선수를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금메달에의 집념이 강력했다.
그분이 뿌린 노심초사한 땀방울과 질풍같은 추진력이 오늘의 한국스포츠를 키워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못할것이다.,
그분의 크나큰 야망과 포부를 후진들이 얼마만큼 계승해 나갈지-. 깊이 머리숙여 명복을 빈다.
김성집<체육회훈련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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