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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싸워 을이 이기는 법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갑과 싸워 을이 이기는 법

깜짝 놀랐다. 을의 대응법을 다룬 일부 책을 보니, 을은 갑의 심리를 이해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예의를 갖춘 노선을 취하라는 식이다. 자존심이 상했다. 여기서는 ‘처세’가 아닌 을의 싸움법을 다룬다.

‘을’에게도 반전은 가능할까

tvN ‘코미디 빅리그’의 한 코너로 ‘갑과 을’이 있다. 코너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우리 사회의 갑을 관계를 절묘하게 비튼 반전 개그. ‘땅콩 리턴’ 사건으로 재조명 받고 있는 ‘갑과 을’의 한 소재를 보자.

고급 주상 복합 아파트에 사는 한 중년 남성. 그는 600여 개 가맹점을 보유한 치킨 브랜드의 사장이다. 그의 ‘갑질’은 주차장에서 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차 앞에 다른 차가 세워진 걸 두고 경비원을 몰아붙인다. “내 눈앞에 눈꼴 시린 것들이 있어서야”, 갑들의 전형적인 심리다.

사장은 경비원에게 집 안 쓰레기를 버리라고 지시한다. “너 자를까”라는 윽박질과 함께. 지위 관계를 이용한 협박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을’이었던 경비원의 반전이 있다. 경비원은 그가 소유한 치킨집에서 치킨을 주문하는 소비자, 즉 갑이다. 그 권리를 앞세워 복수에 나선다.

물론, 현실이 아닌 코미디다. 그렇다면 세상 대부분인 ‘을’에게도 이 코미디 프로그램처럼 현실에서의 반전이 가능할까. ‘땅콩 리턴’을 보면, 싸움은 힘들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갑질’엔 증거 확보가 중요하다

일등석에 조현아와 승무원, 사무장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세상에 알려지는 대신 피해자 두 사람은 처참한 심정을 안은 채, 결국 ‘갑질의 리그’로 묻혔을 것이다.

갑과 을, 단둘이 붙은 싸움에서 ‘을’이 이길 확률은 극히 낮다. 특히나 오너 집안, 즉 인사권의 칼을 휙휙 휘두르는 ‘슈퍼 갑’이라면 100% 지는 게임이다. 하지만 현장에는 목격자가 있었다. 일등석에 탔던 승객이 당시 상황을 친구와 SNS로 나누며 실시간 목격담을 남겼다고 한다.

검찰 관계자는 그 SNS 내용이 워낙 구체적이라 이만한 증거가 없다며 놀랐다는 후문. 불편부당 ‘갑’과의 싸움에서는 무엇보다 ‘증거 확보’가 중요하단 걸 알려준다.

이제 ‘갑’과의 싸움에 밥줄이 걸린 사무장이 방송 인터뷰에 나섰다. 쉽지 않았을 일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얘기에 공감해줄 ‘동지들’, 즉 을들의 의리를 기대했을 것이다. 한국 사회 10%가 슈퍼 갑이라면 나머지 90%는 을이다. 90%의 을이 뭉친다면 갑과의 싸움도 해봄직하다.

세상 ‘을’들에겐 실시간 SNS가 있다

사주명리학자 조용헌 교수는 2013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용헌 살롱’에서 을의 싸움법을 전했다. 내용은 “갑(甲)은 남산 위의 큰 소나무같이 크고 튼튼한 나무를 가리킨다. 반대로 을은 등나무나 칡넝쿨처럼 작고 여린 나무이다. 자기 혼자서는 자립을 못 하고 큰 나무를 의지해서 둘둘 휘감고 올라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로 시작한다.

요즘처럼 ‘슈퍼 갑질’이 횡행하는 시대에 을이 갑을 상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을(乙)의 남편인 경(庚)을 불러들이는 방법이다. 경은 쇠기둥이나 도끼를 상징한다. 천간에서 을과 경은 찰떡궁합이다. 경이라는 쇠도끼를 이용해서 갑이라는 견고한 소나무를 찍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보니 경은 인터넷이다. 인터넷에 올라가면 갑도 순식간에 절단 난다. 그러므로 갑의 상극은 인터넷이다.” 마치 이번 ‘땅콩 리턴’ 사건의 결과를 예고하는 글 같다. 맞다. 을의 동지는 인터넷, 요즘엔 SNS다. 증거를 찾고, 부당한 횡포를 퍼트리는 네티즌 수사대가 득실댄다. 난 이들을 을의 파수꾼이라 불러주고 싶다.

강준만 교수의 책『갑과 을의 나라』에서도 갑질의 고발자로 인터넷을 얘기한다. 갑질을 생생하게 고발할 수 있는 각종 녹음, 촬영 기술의 발달이 ‘밀실의 광장화’를 만들고, 갑질을 효과적으로 고발하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

요즘은 실시간 모바일 세상이다. 스마트폰 중독, 프라이버시 침해 등 걱정스런 면도 있지만 모바일이 ‘갑질’에 대한 실시간의 감시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 을의 입장에서 얼마나 든든한 모바일 세상인가. 90% ‘을’의 손에는 카메라와 SNS가 가능한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

2015년엔 이런 디바이스들이 ‘사물 인터넷’(생활 속 사물들을 유무선 네트워크로 연결해 정보를 공유하는 환경)이란 이름으로 연결된다. 갑을 관계에서 ‘사물 인터넷’을 설명하면 이런 게 되겠다. ‘갑들의 진상 짓을 유무선 네트워크로 감시해 진상 짓을 공유하는 을들의 연합?” 뭐, 이런 식.

기획=강승민 여성중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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