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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관객 움직인 그의 영화 속엔 가족이 있다

중앙일보

입력

국제시장

윤제균 감독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키워드는 단연 ‘가족’이다. 특히 최근작으로 올수록 그의 영화는 가족을 강하게 내세운다. 전작들과 비교할 때 ‘국제시장’에서 어떤 ‘힘’을 느낄 수 있었다면, 그건 180억원이라는 제작비가 만들어낸 스펙터클보다는 가족이라는 테마의 심화 때문이다. 물론 그는 여전히 대중이 자신의 영화를 보며 즐거워하길 바라고, 평론가보다는 관객의 눈높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감독이다. 오로지 재미와 감동을 추구하고, 다소 작위적인 플롯 구성과 설정도 예전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국제시장’은 조금 달라 보인다. 덕수(황정민)의 가족사가 지닌 진한 사연 때문이며, 그 사연이 지닌 역사성 때문이며, 그 역사는 현재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와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가끔은 ‘영화를 만들지 않은 시간’에 주목해야 할 때가 있다. 윤제균 감독이 그런 경우다. 2001년에 데뷔해 흥행 감독으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세 번째 영화 ‘낭만자객’을 내놓았던 2003년부터 네 번째 영화 ‘1번가의 기적’을 선보인 2007년까지, 그 4년의 공백은 지금의 윤제균 감독을 말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설명해야 하는 부분이다. 첫 영화인 ‘두사부일체’(2001)와 ‘색즉시공’(2002)은 그에게 ‘흥행 감독’이라는 수식어 이상의 성공이었다. 충무로는 그를 한국 코미디 장르의 해결사처럼 여겼고, ‘7대 3의 법칙’이라 불리는 이른바 ‘윤제균의 공식’마저 등장했다. 코믹 요소와 감동 요소의 황금 비율로서, 한 시간 동안 웃기다가 마지막 30분에 눈물샘을 자극하는 방식이었다. 윤제균 감독 이후 이런 구성의 코미디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감독 자신이 공식을 폐기 처분한 지금도 여전히 그 영향력은 남아 있다.

색즉시공

정점은 ‘색즉시공’이었고, 브레이크를 건 영화는 ‘낭만자객’이었다. 감독의 대학 시절 경험담과 주변 이야기 등 ‘현실’을 토대로 한 ‘색즉시공’은, 아슬아슬한 표현 수위와 엉성한 에피소드 구성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역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젊은 관객과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낭만자객’은 자신의 세계에 빠진 감독의 웃음에 대한 강박이었다. 그 결과 소통은 실패했고, 유머 코드는 낯선 경지를 넘어 생뚱맞았다. 달래(고주연)의 죽음 이후 갑작스레 무거워지는 후반부는 결정적 패착이었다. ‘1번가의 기적’ 개봉 즈음 만났을 때 윤제균 감독은 ‘낭만자객’의 실패 이후를 “크리에이터로서 자신감을 상실한 시간”이었다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관객과의 소통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는데 그게 깨졌다. 지나고 나니 자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텐 감독으로서 능력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이상 새로운 걸 보여줄 것도 없었고 보여줄 자신도 없었다.”

‘웃음’에서 ‘가족’으로 시선을 옮기다

1번가의 기적

이때 그를 구원한 존재가 바로 ‘가족’이었다. 특히 2004년에 태어난 첫 아이는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영화의 기준이 흥행이었다면, 흥행을 위해선 그 어떤 영화도 만들 수 있었다면, 아이가 태어난 후엔 뭔가 다른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많은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1번가의 기적’을 선택한 건 그런 이유였다. 전작들이 모두 ‘청소년 관람불가’였다면 ‘1번가의 기적’에선 ‘15세 관람가’로 내려왔고, ‘해운대’(2009)와 ‘국제시장’은 ‘12세 관람가’ 영화다. 소재와 표현 수위의 변화와 함께 그 테마도 변하기 시작했다. 역시 그 중심은 ‘가족’이었다.

두사부일체

어떻게 보면 윤제균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영화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는 과정이었다. 초반의 세 영화에서 가족은 서브 플롯에 속하거나 어떤 배경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첫 영화 ‘두사부일체’에서 가족은 담임 선생 봉팔(박준규)이 윤주(오승은)의 집을 가정 방문할 때 잠깐 등장한다. 모녀가 힘겹게 살아가는 달동네의 가난한 가정이다. ‘색즉시공’의 은효(하지원)도 엄마(선우은숙)와 단둘이 산다. ‘낭만자객’의 요이(김민종)와 달래는 부모 없이 살아가는 남매다. 이처럼 윤제균 감독은 캐릭터의 연민을 자아내기 위해, 부모가 없거나 아버지가 없는 가정을 하나의 장치로 이용했을 뿐 그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어설프게 가족의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웃음’을 주는 데 더 집중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자신이 추구하는 스타일의 ‘웃음’은 양립하기 힘들다는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1번가의 기적’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역시 가난한 가족들의 이야기이며, 역시 이른바 ‘결손 가정’들의 이야기다. 달라진 건 비중이다. 과거엔 서브 플롯이나 배경에 불과했던 가족이 영화의 중심으로 진입했다. ‘신(辛)’라면을 ‘푸’라면으로 읽는 식의 언어 유희는 여전하지만, 억지스러운 웃음 코드도 상당 부분 사라졌다. 철거민들의 이야기이기에 세게 표현하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훨씬 더 강렬한 비주얼을 보여줄 수 있었겠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에 집중한다. 한때 챔피언이었지만 폐인이 된 아버지(정두홍)에게 다시 챔피언 벨트를 안겨주고 싶은 복서 명란(하지원), 부모 없이 병든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두 꼬마 일동(박창익)과 이순(박유선), 엄마와 살아가며 신분 상승을 꿈꾸는 선주(강예원)…. 영화는 그들 가족에게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해피엔딩을 마련한다. ‘낭만자객’에서 외로운 ‘남매(가족)’를 비극적인 상황으로 내몰았던 걸 생각한다면, 거의 본질적인 변화다.

재난과 희생을 통해 끈끈해진 가족애

해운대

두 편의 ‘1000만 영화’인 ‘해운대’와 ‘국제시장’은 가족이라는 관점에서 이란성 쌍생아와 같다. 그것이 자연 재해든 피난길이든, 두 영화는 재난 상황에서 가족이 겪는 드라마를 보여준다. ‘해운대’는 거대한 쓰나미를 통해 가족의 의미가 회복된다.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일로 잠시 갈등을 겪던 연희(하지원)와 만식(설경구)은 삶과 죽음이 오가는 급박한 상황을 겪은 후 가정을 이룬다. 이혼한 부부인 김휘 박사(박중훈)와 유진(엄정화)은 딸 지민(김유정)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동춘(김인권)은 홀어머니(성병숙)를 잃고서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해운대’는 비극을 통해 더욱 확고해지는 가족의 가치를 보여준다.

윤제균 감독

‘국제시장’에서 덕수 일가의 운명을 휘저어 놓은 건 전쟁이라는 역사적 재난이다. 1950년 12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서 생이별한 가족. 이후 영화는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덕수의 인생을 보여준다. 그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가게 ‘꽃분이네’를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한다. 그의 마음속엔 항상 생이별한 아버지(정진영)와 동생 막순이(신린아)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영화에서 사라져 버린 ‘이산가족’의 이야기를 부활시킨 ‘국제시장’은, 여기에 어린 시절에 전쟁을 겪었던 부모 세대의 희생을 결합한다. 최근 이념적 프레임 안에서 ‘국제시장’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는데, 조금은 아이러니다. ‘국제시장’은 가족과 세대에 대한 영화이며, 부모 세대가 어떻게 생존하며 가족을 지켰는지를 보여준다. 덕수의 희생은 거창한 무용담이 아니라, 당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장(장남)’이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했던 길이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결국 만나지 못한다. 극적으로 막순이는 찾았지만, 이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흥남 부두의 이별 이후 60년 넘게 아버지는 그리워해야만 하는 존재다. 역사의 고통을 이산가족에 투영한 ‘국제시장’. 이제 윤제균 감독은 자식 세대의 ‘가족 시네마’를 만들 차례일지도 모른다.

글=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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