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대연정 … 메르켈, 첫 여성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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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출신의 앙겔라 메르켈(51.사진) 기민당수가 독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다. 대연정 협상을 벌여온 중도 우파 기민.기사당 연합과 중도 좌파 사민당은 10일 메르켈을 차기 총리로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독일에서는 1966년에 이어 두 번째로 대연정이 출범하게 됐다. 메르켈은 이날 합의 뒤 기자회견에서 "11%에 이르는 높은 실업률과 불황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개혁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총리를 포함한 내각 각료 직은 양측에서 8명씩 맡기로 했다. 기민.기사당 연합은 총리 직과 총리부장관 외에 6개 장관 직을 차지할 전망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 9일. 이혼 전력이 있는 35세의 평범한 물리학자였던 메르켈이 장벽이 붕괴됐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으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장벽이 무너지면 서베를린 최고급 호텔인 캠핀스키 호텔에 가서 굴을 사먹자"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갖는 의미를 그녀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서야 그녀는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신의 삶을 규정해 왔던 동독이 지도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진로를 놓고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나서기를 꺼리고 수줍음을 잘 타는 개신교 목사의 딸. 그런 그가 정치에 투신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현실에 눈을 뜬 그녀는 스스로 정당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두 달 만에 동독 민주각성당 대변인이 됐고, 36세에 통일독일의 초대 국회의원 겸 여성.청소년 장관이 됐다. 45세에 기민당 당수, 그리고 정치 입문 16년째인 51세에 마침내 총리가 됐다. 그의 출세 가도는 벼락처럼 빨랐고, 불꽃처럼 화려했다.

정치인으로서 그녀는 3박자를 갖췄다. 냉철한 판단력과 치밀한 준비성, 불굴의 추진력이다. 불법 정치자금 사건으로 기민당이 곤경에 처했을 때 타협의 수완을 발휘해 당을 추슬렀다. 밀어붙이는 뚝심은 '독일의 마거릿 대처'라는 별명을 낳았다. 당에 부담이 된다며 정치적 양부(養父) 격인 헬무트 콜 전 총리와의 인연을 매몰차게 끊어버리기도 했다. '일회용''촌뜨기'라는 비아냥은 쑥 들어갔다.

메르켈의 성향은 보수적이다. 또 친미주의자다. 동독 연구원 시절에는 은퇴 후 미국에 이민 갈 생각까지 했다. 공산체제를 겪었던 경험 때문에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대연정의 실험을 떠맡은 그녀 앞에 놓인 과제는 결코 만만치 않다. 기민.기사당 연합과 사민당의 시각차를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기민당 일각과 사민당에 팽배한 불신의 벽을 극복하고 좌우를 아우를 수 있을지도 문제다.

그는 "독일은 성실하고 신뢰받는 나라가 돼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과연 그는 병을 앓고 있는 독일에 비전을 보여줄 수 있을까. 독일과 세계가 메르켈을 주목하고 있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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