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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김해 하양 양천 태인 허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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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성이란 원칙으로 아버지를 따른다. 그러나 유독 아버지 아닌 어머니의 성을 따라 가문을 창립하고 2천여년을 이어온 성씨가 있다.
허씨. 김해·하양·양천·태인 네 본관의 우리나라 허씨들은 모두 한 어머니 자손에서 갈라져 어머니의 성을 잇고 있다.
아득히 2천여년전 가락국 김수로왕 아내 허황왕(보주태후)이 이들 허씨의 시조 어머니가 된다.
허황후는 수로왕과 사이에 10남매를 낳았는데『한 아들은 대를 잇게 해달라』고 유언, 둘째 아들이 허씨를 성으로 쓰게됐다고 전한다.
가락이 신라에 망하면서 왕족 허씨도 전국에 흩어졌다. 허후의 35세손 허염의 후손은 김해에, 33세손 허강안의 후손은 하양, 30세손 허선문의 후손은 공암(현 김포군 양천) ,역시 30세손 허사문의 후손은 용인에 자리잡아 각각「김해」「하양」「양천」「태인」파의 시조가 되어 분파한다. 또 허씨 중 한파에서 인천 이씨가 갈라진다.
김해김씨, 허씨, 인천 이씨는 이같이, 한 형제인 만큼 성이 다른 종씨로 뭉쳐 서로 결혼을 피한다. 근래는 가락 종친회를 조직, 혈족의 유대를 다지고 있다.

<차남이 대를 이어>
허씨는 전국이 30여만명(성별 인구 순위 29위).「김해 허」가 50%로 가장 많고「양천 허」40%, 「하양 허」「태인 허」가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허문은 결코 많지 않은 인구에도 불구, 조선조에 정승 6명을 비롯해 고려와 조선에 걸쳐 숱한 인물을 배출해 명문의 지위를 누렸다.
특히「양천 허」는 조선조에 6정승 중 5명을 배출하며 당쟁의 중심가문으로 한 시대를 주름잡았다.
허난설헌·허균 남매는 조선조에 양천 허씨가 낳은 천재.
1569년(선조2년)에 태어나 1618년(광해군10년)50세의 나이로 능지처참형을 당한 허균은 벼슬길에 있을 때도 자유분방한 사상과 행동으로 당시 보수적인 유림들로부터 미치광이·패륜아·부도덕자로 조소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선구적 사상가·혁명아로 보다 긍정적 평가를 얻고 있다. 재승박덕의 성품 탓으로 드러낸 많은 인간적 결함과 인격파탄의 성향에도 불구, 그는 썩고 병든 조선조 불평등 계급사회에 과감히 도전하고 나선「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전국에 30여만명>
그는 두 차례나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모두 실패, 끝내는 능지처참의 혹형으로 그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의 사회개혁 사상을 담은 소설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에서 국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송시열의 서인과「예송」시비를 벌였던 남인의 영수 허목·허적은 조선당쟁사의 거두.
특히 허목은 학문에서 송시열과 쌍벽을 이룬 대 유학자로서 허문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고있다. 그는「학·문·화의 삼고」라 불렸으며 특히 그의 전서는「동방의 제1인자」로 일컬어질 정도였다.
이들에 앞서 성종·연산군 때에 각 우의정을 지낸 허종·허침 형제와 허종의 현손 허욱(선조 때의 좌의정)허침의 아들 허신(중종때 무관), 허반(무오사과 5현의 1인)등은 모두「양허」가 배출한 인물이다. 재능 많은 허씨의 전통은 남도 진도의 운림산방에서「3대 화맥」으로 피어난다.
소치허유·미산허형·남농허건으로 이어지는 3대의 동양화·한국남화는 우리 예술사의 자랑스런 한 장. 일문의 허백련이 역시 한국 남화의 거목으로「허문」을 빛냈었다.
조선조의 허씨 인물 가운데 특기할 사람은 동의보감 25권을 펴 낸「한국의 히포크라테스」허준. 동의보감은 지금도 한·중·일에서 한의학의 바이블처럼 돼있다.
「하양 허」는 세종조 좌의정을 지낸 허조와 아들 허상(좌찬성)·손자 허조 3대가 사육신과 깊은 관계를 맺어 충절의 집안으로 꼽히고 있다.

<소치료의 3대 화맥도>
허조는 조선초기 처음으로 학당을 세웠고 후일 사육신의 스승으로 정신적 지주가 됐다. 허상는 수양대군에게 김종서·황보인을 죽인 것을 잘못이라고 주장하다 유배, 교살 당한다.그의 아들 허유는 사육신 이개의 대부이며 김문기의 사돈으로 그의 집에서 함께 단종복위모의를 했으며 발각되자 자결, 사육신과 행동을 같이한다.「김해 허」는 고려조 허홍재(평장사)·허유전(정승)·허 옹(전리판서)·허기(오선중 1인)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나 조선조에선 그게 번영을 누리지 못했다.
허위는 한말 이 나라가 일인의 손에 넘어갈 때 원주에서 8도 의병을 모아 군수장을 맡아 일군에 과감히 맞서 싸웠던 의병장.
이밖에 허빈·허병률·허형 등 숱한 독립운동가가 나와 김해 허를 구국의 집안으로 자리잡게 했다.
현대에도 허문은 각계에 많은 인물을 남고 있다. 내각수반을 지낸 허정을 비롯, 허경구 (김해) 허경고(양천) 허청일(하양)의원이 있으며 허무인(양천·망·여) 허길(양천) 허적(양천)등은 전 국회의원, 관계엔 허문도(김해)문공부 차관을 비롯, 허삼수(김해) 허화평(김해) 전청와대 수석비서관 등이 있다.
학계엔 한글학회이사장 허웅(양천)·고대교수 허발(독문학)형제와, 허문회(양천·서울대), 허형근(하양·서울대), 허창운(김해·서울대), 허봉열(하양·서울대), 허문강(양천·고대), 허위(양천)전 동국대경영대학원장, 허세욱(양천·외대)등이 있다.
법조계는 허만호(김해) 전 대검검사를 비롯, 허형구(김해) 전검찰총장, 허규(양천) 전부장판사, 허정훈(김해)서울민사지법 수석부장판사, 허은도(김해)제주지검장이 버티고 있다.
재계의 허정구(김해) 삼양통상회장, 허준구(럭키금성그룹부회장), 허신구(금성사 사장)등 형제는 너무나 유명하다.<글 신성호·사진 이창성 기자>▲다음주는「김영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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