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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열정 혹은 욕망의 이중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구스타프 클림트Gustave Klimt, <다나에danae>, 1907~1908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본래의 모습을 숨길 때가 있다. 자기의 단점과 목적을 숨기는 데 변신만큼 유용한 도구도 없다. 현대적인 처세술 용어인 ‘이미지 메이킹(Image making)’도 사실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목적을 갖는다. 반면 자기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것도 변신이다. 쟁취하려는 이도, 자기를 지키려는 이도 변화를 부르짖고 변신을 갈구한다.

그리스 신화는 변신의 두 가지 표정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제우스는 자신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더 화려하거나 더 은밀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다프네는 자신을 지키려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변신하길 마다하지 않는다. 피그말리온의 욕망의 결과물로 한낱 조각상에서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한 갈라테이아가 느꼈을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자기 자신이 변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화려함 뒤에 감춰진 제우스의 욕망

“우리가 더 이상 주변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그때가 바로 우리 자신을 바꿀 때다.”(빅터 프랭클)

그리스 신화의 수많은 캐릭터 중 ‘신 중의 신’ 제우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여인을 납치하고 겁탈한 그를 ‘올림푸스의 제왕’으로 만든 그리스 신화의 세계관을 현대인이 곧바로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단 하나의 완벽한 신’을 만들어 숭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 신화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신의 완전무결성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질투하고, 삐치고, 분노하고, 폭주하는 신들의 변화무쌍한 감정 상태다. 그리하여 신들의 온갖 횡포에 맞서는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투쟁과 도전이 그리스 신화 전편을 흐르는 감동의 원천이 아닐까. 제우스는 윤리나 정의감의 제왕이 아니라 ‘변신의 제왕’이었다. 그가 지혜의 여신 아테나보다도, 바다의 신 아폴로보다도, 그리고 모든 신을 통틀어 가장 뛰어났던 재능은 바로 ‘변신술’이다.

한 마리 아름다운 백조로 변해 레다를 유혹하고, 먹장구름으로 변해 이오에게 키스하고, 흰 소로 변신하여 에우로페를 납치한 제우스. 심지어 자신의 딸이었던 아르테미스로 변신해 칼리스토와 동침하고, 전쟁으로 집을 비운 암피티리온으로 변신하여 그의 아내를 범한 제우스의 변신술은 그야말로 신출귀몰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상천외한 변신의 모습은 바로 ‘황금빗물’로 스며들어 다나에를 유혹한 것이었다. 클림트의 <다나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제우스의 바람기에 분노하는 이성은 잦아들고 어느새 ‘제우스의 변신이 이토록 아름다운 유혹의 기술이었나’ 하고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제우스를 주인공으로 다룬 수많은 그림을 보았지만, 제우스의 본 모습이 등장하지 않은 클림트의 다나에야말로 역설적으로 제우스를 가장 아름답게 그린 그림인 듯하다.

이 그림에서 제우스는 탐욕스러운 남성이 아니라 황금빛 빗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랑의 축복으로 그려진다. 살포시 감은 다나에의 두 눈과 살짝 벌린 입술은 제우스가 그녀에게 선사해준 열락이 얼마나 달콤한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 기쁨을 누구에게도 나눠주기 싫다는 듯, 오직 혼자만의 희열로 간직하고 싶다는 듯, 다나에는 자신의 몸 중 가장 은밀하고 아름다운 곳을 살포시 그러쥐고 있다. 제우스가 황금 빗물이라는 자신과 가장 닮지 않은 대상으로 변한 이유는 바로 다나에의 아버지가 제우스의 침입을 예상하고 그녀를 단단히 구속했기 때문이었다. 변신의 귀재 제우스는 딸을 외딴 성곽에 가둬버린 엄한 아버지의 철통 수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나에의 방에 몰래 황금 빗물로 ‘스며들어’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다나에는 제우스와의 연애 사건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힘들게 페르세우스를 낳지만, 훗날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죽인 영웅이 되어 인간의 아들 중 가장 강력한 존재로 군림하게 된다. 이 그림에서는 제우스의 본모습이 숨겨짐으로써, 제우스가 남기고간 열락의 자리만이 그려짐으로써, ‘사라짐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신의 사랑이 그려진다.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그녀들은 행복했을까

피터 라스트만(Pieter Lastman), <주피터(제우스)와 이오를 발견한 주노(헤라)>, 1618년

제우스는 신들의 제왕이었지만 아내 헤라의 질투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조강지처의 질투를 나 몰라라 할 정도로 뻔뻔한 위인은 아니었지만, 매번 헤라의 감시망을 피해 신출귀몰한 변신 작전을 펼쳤다. 그중에서도 이오를 유혹하기 위해 먹구름으로 변신한 에피소드야말로 화가들이 가장 열광하는 제우스의 테마였다. 이 이야기에는 ‘신조차 조강지처의 질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되는구나’ 하는 인간적인 유머가 있으며, 신의 위대함보다는 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익살스런 휴머니티가 있다. 제우스는 아내의 감시망을 피하려고 어느 날 먹구름으로 변신해 아름다운 여인 이오를 유혹하는데, 그것은 제우스가 생각해낸 가장 교활하면서도 파렴치한 연막작전이었다. 헤라가 먹구름이 일어난 곳을 수상히 여겨 황급히 그곳을 찾아가 남편의 간통을 밝혀내려 하자 제우스는 죄 없는 처녀 이오를 암소로 둔갑 시켜버린다. 피터 라스트만의 그림에서 영문도 모른채 아름다운 눈을 껌벅거리고 있는 하얀 암소가 바로 이오다. 황급히 천으로 은밀한 부위를 가리고 있는 제우스의 십년감수한 듯한 표정은 보는 이의 연민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라스트만이 이 연애사건을 질투심으로 이글거리는 헤라와 아내에 대한 공포로 벌벌 떠는 제우스를 익살스러운 희극으로 그려냈다면, 코레지오는 이 장면을 너무도 로맨틱한 화풍으로 그려낸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거대한 먹구름이 마치 탄탄한 근육으로 무장한 건장한 남자의 팔처럼 이오의 허리를 감싸고, 희미하지만 날카로운 콧날을 자랑하며 이오의 입술을 훔치는 제우스의 얼굴은 섬뜩하면서도 광기어린 매혹의 향기를 뿜어낸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이오의 표정은 지상의 남자들에게서는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위대한 사랑을 향한 비밀스러운 열광으로 한껏 달떠 있다.

주피터가 레다와 에우로파와 이오와 다나에, 칼리스토와 세멜레, 가니메데와 니오베, 메티스와 테미스 등 일일이 다 거명할 수도 없는 온갖 여신과 여인, 요정들과 떠들썩한 연애 행각을 벌였을 때, 그녀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변신 이야기>에는 그녀들이 결코 제우스를 먼저 자발적으로 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에우로파는 제우스를 피하기 위해 미친 듯이 헤엄쳐 도망쳤고, 이오는 헤라의 질투를 피해 세상 끝까지 도망치려 했으며, 데메테르는 제우스를 피하기 위해 암소로 ‘변신’했지만, 그녀를 따라 ‘황소’로 변신한 제우스는 끝내 데메테르를 범했다. 심지어 데메테르는 제우스의 친누이였다.

조각작품’에서 ‘여인’이 된 갈라테이아

“당신이 변화를 멈춘다면, 당신의 삶은 끝난 것이다.” (브루스 바튼)

제우스와 연인들의 ‘사랑’을 그린 화가들이 거의 남자였다는 것을 봐도 이렇게 제우스와 여인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채색한 것은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시선임을 알 수 있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사랑받기는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랑을 받지는 못하는 여성’의 입장을 성찰해보게 한다. <변신 이야기> 속에서 여전히 포커스는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는 ‘남성’ 피그말리온이지만, 그가 만든 조각상이 이름 없는 돌 덩어리에서 ‘갈라테이아’라는 어엿한 이름을 가진 ‘여성’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언제 읽어도 흥미진진하다.

화가 장 레옹 제롬은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남성’의 환희를 살포시 옆모습으로 보여주는 대신, 마침내 조각상이 진짜 살아있는 여성으로 변한 순간에 그녀의 앞모습은 감춘다. 그럼으로써 두 사람에게 존재할지도 모를 갈등의 가능성은 은폐된다. 적어도 이 그림 속에서 ‘두 사람’은 완전히 행복해 보인다. 큐피드의 화살이 이제 막 시작되는 연인들을 향해 정조준되고 있기 때문이다. 피그말리온은 그녀를 숭배하듯 올려다보며 키스하고 있고, 여성은 다정하면서도 적극적인 몸짓으로 자신을 창조해준 남성을 향해 키스에 화답한다. 어찌 보면 그녀가 오히려 이 키스를 주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여성을 진심으로 ‘사랑의 주체’로 생각하기보다는 육체적 욕망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걸핏하면 여성을 납치하는 제우스와는 달리,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의 로맨티스트로 꼽을 만하다. 여성혐오증을 앓는 그에게 유일한 사랑의 대상은 ‘살아있는 여성’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완벽한 조각상, 즉 ‘생명이 없는 사물로서의 여성’이었다.

피그말리온은 그 차가운 대리석상에게 밀어를 속삭이고, 아름다운 장신구를 걸어주며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가 추울까 봐 담요를 덮어주기도 하면서, 그녀를 ‘생명이 없는 그것, 차가운 3인칭’이 아니라 ‘사랑을 줄 수 있는 당신, 뜨거운 2인칭’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리고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간절히 기도한다. 제발, 그녀가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진짜 여성으로 거듭나게 되기를. 딱딱한 조각상을 마치 살아있는 여성처럼 애지중지하며 지극정성을 다 하는 그의 간절한 기도에 아프로디테는 마침내 감복하고 만다. 낭만과 열정을 다해, ‘생명이 없는 사물’을 ‘따스한 체온이 가득한 여인’으로 만든 피그말리온의 기적은 바로 로맨티시즘의 승리인 셈이다. 오비디우스의 입김이 서린 피그말리온 이야기는 남성의 승리라기보다는 ‘사랑의 승리’로 다가온다.

에드워드 번 존스의 <피그말리온>에서 갈라테이아는 한편으로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한편으로는 얼떨떨하고 공허한 표정으로 피그말리온을 바라본다. 그녀의 표정은 사물이라는 족쇄에 갇혀 있다가 살아있는 생명체로 해방된 자의 희열이기보다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듯한 당혹스러움을 담고 있다. 화가의 입장에서 갈라테이아는 필생의 역작이자 불멸의 연인이다. 그러나 여성의 입장에서 갈라테이아는 갓난아기와 소녀 시절을 박탈당한 채, ‘갑자기 성인 여성으로 태어난 사이보그’에 가깝지 않을까. 그녀의 공허한 표정에서는 눈물이 금방 뿜어져 나올 것처럼 아련한 슬픔마저 감돈다. 아프로디테의 축복과 피그말리온의 열정 속에서 태어난 사랑의 기적, 갈라테이아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

그 후 갈라테이아는 과연 행복했을까

코레지오(Antonio da Correggio), <주피터와 이오>, 1532~1533년

피그말리온의 로맨티시즘에 대해 버나드 쇼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입장을 보였다. 그는 ‘여성’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어본 것이다.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이 그리스 신화에서 확실히 영감을 받은 대목은 바로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를 만들었을 때, 갈라테이아가 과연 피그말리온을 진심으로 사랑했을까’하는 질문이었다. 피그말리온이 현실의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이것저것 요구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살아있는 여성’을 싫어하는 면모에는 병적인 여성 혐오가 자리잡고 있었던 듯하다. 게다가 그가 창조한 것은 갈라테이아의 겉모습이었을 뿐 갈라테이아의 마음과 성격, 취향과 영혼까지 모두 그의 창조물은 아니었다. 그는 여인의 외모를 창조했지만 여인의 영혼까지 창조하지는 못한 것이다.

소설로 다시 태어난 <피그말리온>에서 언어학자 히긴스는 거리에서 꽃을 파는 소녀 일라이자의 ‘저급한 언어습관’을 뜯어고쳐 그녀를 여왕처럼 만들겠다고 호언한다. 그에게 가난한 촌뜨기 소녀를 사교계의 여왕으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뛰어난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완벽한 외모의 조각상 갈라테이아를 만들 듯이, 천재 언어학자 히긴스는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는 최고의 엘리트 여성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 한다.

장 레옹 제롬(Jean- Leon Gerome),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pygmalion and galatea>, 1890년

언어학자 헨리 히긴스는 꽃파는 촌뜨기 소녀 일라이자를 6개월 만에 ‘영국 귀족의 언어’를 쓰는 요조숙녀로 만들어내겠다고 장담하지만, 정작 그녀가 귀족을 넘어 ‘공주’로 대접받자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눈이 바뀌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단지 ‘나의 작품’이라 생각했던 그녀가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자신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감정이 있는 존재’가 되자 여성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녀가 초라한 행색을 하고 꽃을 팔고 있었을 때나, 공주처럼 떨쳐 입고 파티의 여왕으로 등극할 때나, 항상 변함없이 그녀를 ‘숙녀’로 대해준 피커링 대령과 달리 히긴스는 그녀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을 보이든 그녀를 대놓고 무시한다. 그가 일라이자에게 가르쳐준 것은 ‘교양 있는 상류층이 우아하게 말하는 고급영어’였지만, 일라이자가 그의 가르침을 뛰어넘어 각성하게 된 것은 바로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여성 자신의 자존감’이었다. 현대의 갈라테이아라고 할 수 있는 일라이자는 자신을 창조해낸 피그말리온에게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이다.

아폴로의 사랑을 거부한 다프네의 변신

“하느님,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용기를,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주소서. 그리고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라인홀트 니부어)

그리스 신화 속의 모든 변신이 ‘사랑’을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피하기 위해, 사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완전히 변신하는 존재도 있다. 바로 아폴로의 사랑을 온몸으로 거부하기 위해 월계수로 변신한 다프네다. 아폴로의 사랑은 제우스의 사랑처럼 일방적이고 폭력적이지는 않다. 낭만적인 구애의 과정도 없이 여신이고 뮤즈고 인간이고 가리지 않고 납치하고 겁탈하는 제우스와 달리, 아폴로는 진심어린 구애를 담아 ‘제발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다프네에게 간청한다. 아폴로의 오만방자함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에로스가 ‘사랑에 빠지는 화살’을 아폴로에게 쏜 반면, 다프네에게는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않는 화살’을 쏜 것이다. 아폴로는 신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신이었고, 예술과 의학을 관장하는 신이 었다. 제우스가 여인들을 권력으로 제압했다면, 아폴로는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는 매력으로 여인들을 유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올림푸스 12신의 체면조차 구겨가며 사랑에 빠졌던 다프네만은 유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월계수는 신을 거부한 승리의 상징 아닐까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아폴로와 다프네apollo and daphne>, 1908년

위대한 신의 사랑조차도 인간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다프네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 하신(河神) 페네이오스(Peneios)의 딸이었던 다프네는 다른 여신들처럼 스스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에 아버지에게 필사적으로 기도를 드린다. 자신을 정신 없이 쫓아오는 아폴로의 사랑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 무엇으로 변해도 좋다고. 다프네의 아버지 페네이오스는 딸이 좋은 신랑감을 찾기를 항상 바랐지만, 사랑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원하는 다프네의 간절한 소원을 결국 들어주게 된다. 베르니니의 조각상에서 이미 아름다운 월계수로 변해가고 있는 다프네의 몸은 끔찍하기는커녕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녀는 온몸으로 ‘신의 사랑을 거부할 권리’를 증언하고 있는 것만 같다.

다프네에게는 변신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무기도 아니었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죽음이 아닌 다른 존재로의 변신은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절대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끈질긴 신의 구애를 물리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던 것이다. 다프네가 자결이나 실족사가 아닌 월계수로의 변신을 택했다는 것은 그녀의 이야기를 ‘비극’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존재로의 승화’로 볼 수 있는 희망을 암시한다. 영웅들의 승리를 축하할 때마다 머리에 씌어주는 월계수관은 바로 신을 향한 인간의 최초의 승리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아닐까. 다프네는 육체적인 힘이나 지략으로 신을 제압한 것이 아니라 ‘신의 사랑’조차 거부할 권리를 온몸으로 증언함으로써 인간에게도 신의 손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자신의 온갖 능력과 매력에 자신감이 넘치던 아폴로는 처음으로 가슴을 찌르는 생생한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아폴로는 월계수로 변한 모습마저 눈부시게 청초한 다프네를 바라보며 자신의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다프네는 자신의 운명과 싸워 이기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당당히 자리하는 월계수가 됨으로써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것’이 단지 형벌만이 아님을 증언한다.

때로는 변신만이 구원일 때가 있다. 한탄하고, 불평하고, 분노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때. 그때가 바로 세상이 아니라 내 자신이 바뀔 때이다. 변화가 없다면,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그 무언가가 깨어날 수 없다. 변신이 없다면, 우리 안의 무한한 가능성은 그저 평생 가능성으로만 남을 것이다. 우리 안의 그 몹쓸 잠꾸러기를 깨워야 한다.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신들의 생각조차 변화하게 만드는 인간의 용기만이 역사를 바꾼다.

필자 인터뷰ㅣ문화평론가 정여울 씨 - “그림은 영혼의 태반, 현대인에게 절실한 메시지 찾고 싶다”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 정여울 씨가 ‘읽는 그림’을 소재로 삼은 건 그림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과 신화에 대한 동경 때문일 것이다. 그는 태곳적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현대인이 삶에 필요한 행동의 덕목을 찾고, 평면과 틀에 제한된 그림을 통해 현실의 입체감과 역동성을 읽어내는 데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생활 속 인문학의 전도사로 집필과 강연 등 다방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쌓아 올리는 역동의 원천은 바로 그런 통찰력에서 비롯된다. 그림을 ‘읽기로 한’ 이유와 어떻게 읽고 써내려 갈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그림을 읽어준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

“방학 때만 되면 멀리 여행을 떠났다. 그때마다 가장 많이 들른 곳이 박물관이다. 박물관 투어를 하면서 눈길을 사로잡은 게 바로 ‘이야기가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 속의 이야기와 관련된 글들을 찾아보게 되고, 그러면서 예술과 문학에 대한 더 깊은 시선을 얻게 되는 ‘지식 숙성과정’이 좋았다.”

그 그림들에서 얻게 되는 메시지는 어떤 것인가?

“그림, 특히 신화와 관련된 것들을 보고, 책을 읽어보길 반복하다 보면 어떤 메시지들이 떠오른다. 신화는 단지 머나먼 태곳적 영웅들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영혼의 태반이다.”

앞으로 어떤 그림을 읽고, 들려줄 건가?

“미술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작품들을 다뤄볼 생각이다. 특히 우리 시대 에도 영감과 교훈을 주는 (동서양을 망라한) 신화에 대한 이야기와 서양 미술 전반을 더듬는 글을 쓰려 한다. 독자와 함께 그림 속으로, 신화 속으로 떠나고 싶은 소망을 담은 인문학 에세이가 될 것이다. <유길용 기자>

정여울 - 1976년생. 문학평론가. 서울대 독문과 및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침. 2004년 ‘문학동네’로 등단. 저서로는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잘 있지 말아요><마음의 서재><시네필다이어리><정여울의 문학 멘토링>등이 있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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