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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구조 광풍의 한가운데 서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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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투자자들은 대기업 오너와 같은 편에 서면 무조건 돈을 번다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다. 최근 삼성SDS와 제일모직 상장에 모두 45조원의 청약금이 몰렸던 현상이 이러한 믿음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반면 대기업 오너의 전횡에 대해서는 강한 반감이 있다. 특히 승계문제에 있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워낙 이들의 지분율이 낮다 보니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각종 편법이 동원됐던 탓이다.

종합해보자면 대기업 오너에게 속으론 부정적 감정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이들의 승계에 힘을 보태주고 있다는 뜻이다. 즉 오너의 의중이 투자자들의 믿음을 거치며 자기실현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이 같은 현상은 최근 증시에서 지배구조 테마란 이름으로 가속화하고 있다. 심지어 여기 해당하는 기업들에는 정상적인 밸류에이션 적용조차 무의미하단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비유하자면 닭 한 마리를 결국 소 한 마리로 바꿔준다는데 계란 생산 개수를 세서 가치평가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논리다.

물론 이 같은 접근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우선 주식시장이 얼마나 답답하면 그럴까 하는 마음이 든다. 기업들의 실적은 기대에 못 미치고, 그렇다고 앞으로 성장의 기회가 잘 보이진 않고, 세계경제는 유가가 단기간에 반 토막이 날 정도로 요동을 치니 지배구조 수혜주만큼 확실한 게 없다고 믿을 법도 하다.

하지만 필자는 가치투자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접근방법이 투자의 본질에 어긋나는 세 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는 확실하다고 믿은 가설이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배구조 개편과 승계와 관련한 오너의 계획이나 의중을 밖에서는 파악하기 매우 힘든 탓이다. 최근 정몽구 회장, 정의선 부회장 부자가 현대글로비스 보유주식을 대량으로 매각하려 했다가 주가 폭락을 야기했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현대글로비스가 확실한 지배구조 수혜주라고 생각했던 투자자에겐 날벼락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둘째는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소요될 수 있다는 점이다. 투자자들은 이벤트가 이른 시간 안에 발생하길 고대한다. 하지만 오너 입장에선 경영권이 걸려있는 중차대한 일이므로 시간을 길게 놓고 여러 환경이 최적으로 맞물리는 시점을 노린다. 다시 말해 투자자들의 시간과 오너의 시간 사이에 차이가 발생한단 뜻이다. 오너와 끝까지 가볼 생각이 아니라 단기 테마 정도로 생각하고 접근한다면 실망감이 클 수 있다.

셋째는 이미 기대감이 반영된 주가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지배구조 관련주들은 오너가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많은 가정을 깔고 있는데 이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정상적인 가치평가의 잣대로 봤을 때 명백히 고평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대로 모든 가정이 다 맞아떨어지더라도 최상의 시나리오가 기반영된 가격 수준으로 인해 기대했던 주가 상승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가치상승의 가정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은 계열사를 통한 일감 밀어주기, 유리한 조건에서의 계열사 합병 등이다. 추진 가능 여부를 떠나서 이 같은 부의 이전 시도가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미국, 중국 등 다른 나라의 대기업들이 미래를 위한 먹거리를 찾고 혁신할 동안 한국 기업들은 승계하고 있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기업과 투자자 모두 이 문제에 골몰하고 있다. 아니 주식을 매개로 ‘함께 공모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기업인들은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 부의 이전보다 부의 창출에 집중하고, 투자자들은 오너 뒤를 무작정 쫓기보다 올바른 자본배치에 힘쓰기를 기대해본다.

최준철 VIP투자자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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