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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한국 미술 '거장전' 연 안병광 서울미술관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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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안병광 서울미술관 회장이 이대원 화백의 대표작 ‘사과나무’ 앞에 앉아 있다. 가로 5m, 세로 2m의 대작이다. 안 회장은 “그림은 여럿이 나눠볼 때 그 기쁨도 배가된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예술은 훔쳐보기다. 남의 생활을 엿보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행위다. 공감은 그 지점에서 싹튼다. 올해 광복 70년을 맞았다. 격변의 세월, 우리의 지난 발자취를 보고 싶으면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을 한번 찾는 것도 좋겠다. 통인시장에서 세검정 방향으로 자하문터널을 지나 바로 왼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 서울미술관에서 ‘거장전(Masters of Korean Art·2월 15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이응로(1904~89)부터 고영훈(63)까지 근현대 한국미술 대표작가 36인의 70여 점이 나왔다. 그림으로 보는 20세기 한국사라 해도 큰 무리는 없을 터다. 에너지가 터질 듯한 이중섭(1916~56)의 ‘황소’, 우리네 순박한 풍경이 흐르는 박수근(1914~65)의 ‘우물가’도 있다. 모두 서울미술관 안병광(59) 회장의 소장품이다.

 미술관 1층의 한구석, 작가들의 초상화에 비추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자서전을 쓰는 것이다’. 영국 저술가 해블록 엘리스(1859~1939)의 말이다. 그의 선언처럼 전시장은 지난 세기 한국인의 자서전을 닮았다. 제약회사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 지금은 의약품 유통업체 유니온약품을 꾸려가고 있고, 거기에 반듯한 미술관까지 차린 안 회장의 별난 삶을 들여다봤다.

 -한 작품, 한 작품 모두 귀하다.

 “박수근·이중섭·김환기·이우환 등 스타 작가만 있는 게 아니다. 일반에게 덜 알려졌어도 36명 모두 자기 길을 올곧게 간 이들이다. 전통과 현대 가운데서 자신만의 세계를 다진 이들이다. 대한민국에 이렇게 좋은 작가가 많았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사람들이기도 하다.”

 -작품 총액이 35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하나하나 사연이 없는 게 없다. 지난 30여 년간 발품을 팔았다. 그림 공부와 작가 연구도 많이 했고…. 미술품 수집은 결국 화가의 인생을 배우는 것이다. 단지 비싼 작품을 구입하는 게 아니다. 그들 덕분에 제 시간도 풍성해졌다. 사업에만 매달렸다면 메마른 인간이 됐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계발서 한 권이 아닌 미술품 한 점이다’고 생각한다.”

 -혼자 즐길 수도 있었을 텐데.

 “대부분의 소장가가 그럴 것이다. 좀처럼 공개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화는 나눠야 한다고 믿는다. 2012년 8월 미술관을 연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미국 목사 맥스 루케이도(60)가 쓴 동화 『토비아스의 우물』이 있다.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목마른 사람에게 우물물을 고루 나눠줘야 한다는 내용이다. 누구나 미술관에서 시원한 물을 마셨으면 한다. 함께 보고, 느끼고, 만지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미술관은 부자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 야외공원에 있는 소나무(위쪽)와 석파정 정경. 각각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60호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에 올라 있다.

 -그림을 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수업료를 많이 지불했다. 표현이 그렇지만 수장고에는 ‘쓰레기 같은’ 작품도 많다. 당장 버려도 될 만한 것이다. 아직 그럴 만큼 마음을 비우지 못한 모양이다. 컬렉터라면 처지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처음에는 잘 그린 것만 찾았다. 이제는 길게 가는, 즉 생명력이 있는 것을 고른다. 그 정도는 분간할 줄 아는 눈이 생겼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대표작을 주목한다.”

 -미술관 운영은 또 다른 문제다.

 “미술관을 연 지 2년6개월이 돼 간다. 그간 많이 아팠던 것 같다. 격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건 아닌지, 남의 옷을 입고 사는 건 아닌지 회의도 들었다. 다시 하라고 하면 선뜻 나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프다니, 무슨 뜻인가.

 “이번까지 7번의 기획전을 열었다. 다른 사람의 소장품을 빌려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직 우리 미술계에선 상호 신뢰가 적은 까닭인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는 말이 튀어나올 만큼 자존심이 상한 경우도 많았다. 네 번을 퇴짜 맞고, 다섯 번째에 겨우 승낙을 얻은 적도 있다. 정말 고통스러웠다.”

 -다른 어려운 점이라면.

 “미술관을 하려면 무조건 투자만 해야 한다는 통념이 있다. 돈을 벌려고 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수익 개념이 있어야 오래갈 수 있는데, 주변 여건이 그렇지 못하다. 사립미술관이 1년에 10여 개 생기지만 대부분 1~2년 안에 문을 닫고 식당이나 카페로 전업한다. 지속적 발전이 있을 수 없다. 미술품 기증에 대한 세제 지원 등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시간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83년 안 회장은 한일약품 영업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전에 잠깐 의류 오퍼상을 하다가 폭삭 주저앉은 적도 있었다. 남 앞에서 말 한마디 못 꺼냈던 그는 조금씩 자신감을 찾아가며 입사 9개월 만에 영업 부문 1위에 올랐다. 겸손과 성실함 덕분이었다. 돈만 알기 쉬운 세일즈맨의 심성을 가꾸는 데 그림 수집이 최고라는 당시 상사의 권유로 한 달치 월급 23만7000원을 주고 구입한 금추(錦秋) 이남호(1908~2001) 화백의 ‘도석화(道釋畵)’가 그림과 맺은 첫 인연이었다.

 같은 해 9월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르고 이중섭의 ‘황소’ 사진을 7000원에 산 적이 있는데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진품 ‘황소’를 35억6000만원에 낙찰받는, 우연인 듯 우연 아닌 것 같은 일을 겪기도 했다. 현장 경험을 쌓은 그는 88년 유니온약품을 설립했다. 연 매출 3000억원의 회사로 키워왔고, 그간 꿈꿔왔던 미술관도 마침내 열게 됐다.

 -미술관장인가, 경영인인가.

 “본업은 약업인(藥業人)이다. 제 청춘과 인생이 거기에 다 있다. ‘조금만 더 몸을 숙이자’ ‘말을 조금 더 겸손하게 하자’며 일을 해왔다. 요즘 갑을(甲乙) 문제로 사회가 시끄러운데, 저는 항상 병(丙)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래야 상대가 즐거워한다. 애창곡이 ‘오늘도 걷는다마는…’으로 시작하는 ‘나그네 설움’이다. 직원이 75명이지만 지금도 영업 현장을 지키고 있다. 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구입한 서울 구로동 땅이 큰 도움이 됐다.”

 -그렇다면 미술관은.

 “세상에 대한 감성을 키우는 통로다. 그림이 없었다면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만 남지 않았을까. 치유와 소통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향한 꿈이 나를 이끌어왔다. 장수는 무용담으로 세상을 다스리지만 예술가는 시대의 영혼을 그린다. 그런 혼을 만났으니 얼마나 즐거운가. 1년에 몇 점씩 개미처럼 모아왔다.”

 -외국 작가 작품은 별로 없다.

 “지나치게 비싼 것은 감당할 수 없다. 고향이 경기도 용인이다. 어린 시절 뛰놀던 추억,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등 우리네 기쁨과 슬픔에 주로 끌렸다. 간송미술관의 전형필(1906~62) 선생을 쫓아간다면 ‘미친 놈’ 소리를 듣겠지만 롤모델(role model)이 된 건 분명하다. 요즘에는 젊은 화가들을 주시하고 있다. 다만 예전 작가들 같은 열정이 달려 보인다. 일주일 동안 그린 그림을 팔려면 2~3년이 걸리지만 2~3년 정성을 다하면 2~3일에 팔릴 수 있다는 점을 꼭 얘기해주고 싶다. 명작은 거저 나오지 않는다.”

 -미술관 바깥 석파정이 유명하다.

 “흥선대원군(1820~1898)의 별채였다. 2006년 65억원에 인수했다. 석파정 덕분에 미술관 설립도 구체화됐다. 20여 년 버려졌던 곳을 복원해 미술관 야외공원으로 쓰고 있다. 석파정이 어떤 곳인가. 대원군이 당시 세도가였던 김흥근(1796~1870)에게 반강제로 빼앗았다. 권력의 중심지였다. 조선의 역사가 살아 있는 곳이다. 서울에 이만한 장소도 드물다. 미술관 공사 때 큰 다리에나 들어가는 H빔을 썼다. 탱크가 올라가도 문제없을 만큼 단단하게 지었다. 긴 역사를 품으라는 뜻에서였다. 그렇게 400년, 500년을 많은 이와 동행했으면 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지만 ‘짧은 인생을 길게 하는 게 예술’이라고 확신하니까….”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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