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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한제국의 최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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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l910년8윌29일 전국각지의 일본수비군들이 시가행진을 벌였다.
서울거리에는 헌병과 순사가 30m간격으로 도열해 있었고 단 두 사람만 모여도 엄중히 취조해 흩어지게 하는 삼엄한 경계였다. 당시 서울에 있던 일본인 기자 「샤꾸오」(석미동방)는 뒷날 회고에서 『헌병경찰의 번득이는 눈초리 아래 정치집회는 금지되고 한국신문은 물론 일본신문까지도 철저한 통제를 단행해 서울은 사실상 계엄상태의 살벌한 분위기였다』고했다.
철통같은 경계의 뜻은 거리의 벽보가 말해주었다. 서울 요소 요소에 붙은 「일황명치의 병합조서」 「망제순종의 호국조서」, 그리고 통감 「데라우찌」의 담화문이었다.
벽보는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었으며 대한이란 이름은 없애고 우도를 조선으로 호칭한다는 내용을 담고있었다.
병합조인 1주 후 이 사실을 발표하면서 일본은 한국황실 등의 예우를 함께 발표했다.
▲전 황제 순종은 창덕궁 이왕으로, 구황태자와 장래의 세자는 왕세자로해 세습케하며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으로, 그 배필들은 왕비·태왕비·왕세자비로 하며 일본황족의 예로써 전하의 경칭을 사용한다.
▲이왕의 의친 이강·이어부부는 공과 공비로서 전하를 사용하고 그 자손은 영예를 세습케 한다.
이런 예우를 뒷받침해 황실령 34호로 이왕직 왕가를 일본 궁내부대신관리하에 두었다. 이왕가의 세비는 연1백50만엔 (창덕궁 38만엔, 덕수궁 6만엔, 이왕직비, 73만엔, 예비비 16만엔)으로 해 총독부 특별회계에서 지출토록 했다. 이왕직의 직원은 황실이던 때의 절반인 2백73명으로 줄여 총독의 감독을 받도록 했다.

<"조선이라 칭한다">
대한제국 최후의 내각대신을 비롯한 병합공로자를 회유하고 계속 이용하기 위한 소위 「조선귀족령」도 동시에 발표되었다. 당초 작위가 수여된 사람은 모두 76명이었다. 그러나 이들중 판서 김석진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해 음독 순국했고 조정구는 자살미수, 그리고 한규설· 홍순형· 민영달· 조경호· 윤용구· 유길준은 작위를 사양해 68명만이 작위를 받았다.
개화파 친일정객이던 유길준이 그에게 내려진 남작 작위를 거절한 것은 그 뜻이 모호했다. 그는 병합이 실현된 뒤 한강변의 노량진 별장에 은거했는데 간혹 사람들이 찾아가 작위를 받으라고 권할 때면 『한운야학을 벗삼아 살 뿐 경륜도 불평도 애욕도 없는 내가 작위를 받아 새간의 번잡한 예절에 얽매일 것인가』고 했다.
이른바 혜택은 지난날 일본의 편에 섰다가 죽은 사람들의 유족에게도 주어졌다.
즉, 호조참판 김옥균, 이조참판 홍영식, 탁지부대신 어윤중,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군부대신 안구수 등 유족에게 각 1만엔을,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경무사 권집진, 학부대신 서광범, 육군정령 우범선, 육군정령 이주회, 도승지 박영교, 금부도사 조총희, 외부대신 유기환 등의 유족에겐 각5천엔씩의 사금을 지급했다.
병합공신들에게는 귀족칭호와 함께「보국의 댓가」로 소위 은사금이 주어졌다.
우선 이왕가의 의친인·이강·이희 두공가에는 각각84만엔의 은사공분를 주고 그 이자로써 세비를 지급했다.
후작·백작에겐 옛날 세비를 고려, 이에 5할을 덧붙이는 것을 표준으로 상당한 이자를 붙인 은사공채를 내렸고 이와 별도로 후작15만엔, 백작 10만엔, 자작5만엔, 남작3만엔의 은사공채를 내렸다.
매국의 전위였던 일진회에도 돈을 내려보냈다. 이렇게 주어진 돈의 총액은 8백24만6천8백만엔.
일본은 조선의 유생 1만2천1백15명에게 30만엔, 효자·절부의 표상과 함께 미망인 등의 구휼비 23만5천9백엔, 고아·맹아 등의 구호기금 50만엔, 빈민구호금 2백85만엔, 행노병 구호기금 21만3천5백엔, 경학원 (성균관)기금 25만엔, 교육·산업구호기금 1천7백39만8천엔을 책정했다.
일본제국정부는 이들 돈을 모두 임시은사공채 3천만엔을 발행해 충당했다. 그러니까 일제는 단돈 3천만엔, 그것도 현금이 아닌 채권으로 한국전체를 사들인 셈이다.
이 돈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1910년 12월 도오꾜에서 발행된 격주간 그래픽지 특별호에 「다까하시」(설교수신) 는 조선의 부력을 썼다.

<김간진은 음독순국>
이 기록에선 일본의 부력을 당시 화폐로 2백51억4천38만9천5백엔으로 잡으면서 한국의 부력은 통계자료 부족으로 정확한 계산은 어려우나 1906∼7년 한국통감부 제정고문본부 및 일본 농상무성자료를 토대로 25억2천5백37만2천81엔이라는 숫자를 산출해냈다.
한국의 부력을 일본의 10분의1, 당시 이미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의 24억9천6백51만엔과 비슷한 수준으로 본 것이다.
물론 이 숫자를 그대로 믿을 것은 없지만 그들의 계산을 인정한다해도 25억엔짜리 한국을 종이조각에 불과한 은사공채 3천만엔으로 집어삼킨 셈이다.
은사공채는 실제로 기명식 국채증권으로 『정부의 인가 없이는 양도 또는 저당할 수 없도록』되어 있었고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에 이자 연5푼으로 돼있어 그 경제적 가치는 아주 낮았다.
특히 일반인들은 「매국증권」 이라고 경멸하고 이를 가지고있는 자를 매국노라고 멸시했기 때문에 거의 일반에 통용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8·15해방과 동시에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병합비용에 얽힌 매국흥정의 일화가 있다. 병합직전 송병준이 농상공부대신자리에서 쫓겨나 도오꾜에 머물면서 「스기야마」의 소개로 수상 「가쓰라」를 찾았을 때였다.
▲송병준=「이또」통감은 결단력이 없어서 문제다. 지금이야말로 일한합병을 단행할 때다. 각하의 결단이 필요하다.
▲「가쓰라」=하지만 쉬운 일 만은 아니지 않을까?
▲송=조금도 어려울 일이 아니다. 1억엔정도만 있으면….
▲「가쓰라」=1억 엔은 너무 비싸다. 그 절반이라면 몰라도….
▲송=비싸다니 무슨 말인가.
논공행상에서 일본인 병합주역들이 빠질 수 없었다. 통감 「데라우찌」는 자작에서 백작으로 올랐고 천황으로부터 10만엔이 주어졌다. 외상 「고무라」는 백작에서 후작으로, 수상 「가쓰라」는 후작에서 공작으로 각각 작위를 높였다.
헌병사령관 「아까시」는 병합의 날 재빨리 경찰권을 발동, 항일지사들에게 「주거제한명령」을 내리고 예비 검속, 서슬퍼런 언론탄압을 주저 없이 해냈다.
한국인 경영의 신문은 물론, 일본신문 그리고 외국(주로 일본)으로부터 반입되는 모든 신문들을 폐지·체한·금지시켜버렸다. 이때 폐간된 일어신문은 조선일보·조선일일· 경성신보·용산일출·조선시사 등 5종, 그리고 한국신문은 국민신문·한성신문·한양신문·대한매일 등 4종이었다. 대신에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2종의 어용신문만 남겨두었다.
다음에 내려진 것이 「집회결사의 금지」. 기존의 모든 결사는 1주일 내에 해산하고 일체의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이 조치에 따라 병합에 1등 공훈을 세운 일진회를 비롯, 대한협회·서북학회 등 개 단체가 해산 당했다.

<휴지된 매국증권>
일진회고문 「우찌다」는 병합이 가까워 올 무렵 일진회해산을 생각하고있었다. 『일진회는 이미 그 존재가치를 상실했다』 는 것이 당시 그가 도오꾜에서 서울의 「다께다」 앞으로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있다.
소위 「해체비용」으로 일진회에 돌아간 돈은 일금 15만엔. 이 돈은 최고 5천엔 (이용구)에서 최소 10엔까지 일진회원들에게 그 지위에 따라 지급됐다.
원래 「우찌다」는 일진회원을 간도에 보내 농지를 개간, 정착토록 할 구상이었으나 뒷받침을 받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용구는 일본정부 요로에 진정, 「합방의 참된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병합통치에 대한 감시자」로서 일진회는 남겨둬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일진회가 정식 해체된 다음날인 9월13일 이용구는 심한 각혈을 하고 쓰러졌다.
그해 11월 1차 퇴원을 했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다음해 3월 요양 차 도오꾜로 떠났다. 도오꾜 요양 중 병문안 온 「우찌다」에게 이용구는 그의 손을 붙잡고 서글픈 어조로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용구는 그 뒤로 병이 더욱 악화, l912년 5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일본이 한국병합을 외국에 통고했을 때 보인 해외의 반응은 한국에 대한 해외의 불신과 낮은 평가를 반영했다.

<이용구 결국 병사>
영국은 이미 한달 전인 7월초 병합의 뜻을 통고 받고 있었다. 이때 그들은 영일동맹을 상기시키면서 『일본의 대한정책을 원조하는 것이 영일동맹의 기본정신』 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법률문제 몇 가지 즉▲병합 후 관세거치기간을 명확히 해줄 것▲일본의 담배전매제도가 한국에 적용된다면 영국산 담배업자가 입을 타격 우려▲영국산상표의 보호▲재한영국인의 치외법권문제에서 동맹국다운 특례를 부탁했다.
러시아는 포츠머드조약 체결 때부터 이런 사태를 예측해오던 터라 별 이의가 없으며 앞으로 만주에서 일본이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해줄 것을 희망한다고 했다.
미국·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도 이의가 없었다.
한국의 옛 종주국이던 청국도 대세를 따랐다. 기밀누설을 염려해 일본은 공식발표 하루전인 28일에 통고했을 때 청국외교부는 『일본은 앞으로 청주에서 청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기 바란다』 고 했다.
해외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지들은 병합된 한국에서의 영국의 경제적 이익에 관심을 나타냈다. 런던타임즈는 『한국병합은 원래 일본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병합은 문제해결의 유일하고도 현명한 정책임에 틀림없다. 일본은 대륙진출을 위해 한국병합은 필수적』 이라고 논평했다.
미국의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는『일본은 한국병합과 동시 일본의 관세율을 바로 한국에 실시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10년간이나 거치했다는 것은 극히 현명한 정책』 이라고까지 칭찬했다.
나라 잃은 날 민중의 저항은 어땠을까? 을사조약 때의 반대투쟁이나 군대해산 때의 격렬했던 의병항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막을 내린 비극 앞에 저항은 너무 저조했다. 서울에 와 있던 일본기자들은 뒷날 이렇게 회고했다. 『1천만 한국인이 피를 흘리며 일본인을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리들이 가장 두려워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도 조용한 서울거리를 보며 마치 여우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혈병합은 개벽이래 유례가 없는 헌병경찰제도의 일시적 승리였다.
그들은 1905년부터 10년까지의 5년간 무자비한 무력탄압을 했다.
의병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08년 5월 일본은 1개 사단, 1개 여단, 기병파견대 4개 중대, 2천의 헌병 등 기존의 주둔군에다 다시 제22, 제22의 2개 연대를 증강하고 4천여 헌병보조원과 5천여 경찰대를 보강한데다 애국단체 일진회의 무장 자경단도 가세케 했다. 이 병력으로 주둔군사령관 「하세가와」(장곡천), 헌병사령관 「아까시」, 그리고 경무국장 「마쓰이」(송정무)는 초토전이라 일컫는 토벌전을 지휘했다.
이 결과 1907년8월부터 1909년 말까지 의병 1만7천여 명이 살해당하고 3만6천여 명이 부상했으며 이 틈바구니에서 수많은 주민이 죽고 여러 곳의 마을들이 불탔다. 최악의 만행은 1909년9월에 시작돼 두 달 동안 계속된 이른바「남한폭도대토벌」이다. 그때 전라남도의 경우엔 의병의 뿌리를 뽑는다해서 일본군은 육·해양면 포위공격을 했고 주변의 조그마한 섬까지 샅샅이 뒤졌다.
이 토벌로 이름을 떨치던 전해산·심남일 등 의병장 1백3명을 비롯, 4천1백38명의 의병이 죽어갔다.
잇달아 1909년 말부터는 경상도에서, 병합직전인 1910년 여름엔 황해도에서 같은 수법의 초토작전을 했다. 그 처절한 초토작전의 칼날이 한국전역에 죽음의 침묵을 강요했다. 이 때문에 조직적 항일투쟁은 봉쇄당했다. 온 국민은 슬픔과 분노를 삼켜야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일제하의 치욕의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국민의 각성을 촉구했다. 순국한 이들은 동왕정신에 투철한 유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천민으로 사회의 멸시를 받던 사람도 그 대열에 함께 있었다. 기록에 남은 이는 모두 45명.
한말의 유학자로 오욕의 늪으로 가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긴 「매영야녹」의 저자 매천 황현은 유시4수로 처절한 심경을 토로했다.

<처절한 매천의 유시>
난리를 겪다보니 백두년이 됐구나 몇 번이고 목숨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쩔 수 없고 보니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에 비치도다
요망한 기운이 가려 제성이 옮겨지니
구궐을 침범하여 진누가 더디구나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려 조칙에 얽히는 구나,
새와 짐승도 슬피 울며 해악도 찡그리는데
근역 3천리 강산은 이미 심륜했도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간고를 회상허니
사람이 안다고 함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구나
일찌기 나라를 지탱할 조그만 공도 없었으니
단지 인을 이룰뿐이요, 충은 아니도다
겨우 능히 윤희와 곡량적을 따르는데 그칠 뿐
진평과 동방삭의 뒤를 밟지 못함이 부끄럽도다.

<순절한 우국지사들>김석진(판서) 송도정(참판) 이재구 이만희 송종규 장태수 (이상 승지) 정재건 정태근(이상 정언) 송탄면(의관) 홍범직 이만봉(이상 군수) 김지수(감역) 이범진 (전 러시아공사) 이면주(종정원경) 박세화 (참봉) 정동식(첨정) 이중언 (지평) 송병순 (도사) 이승칠(감찰) 반학영(환관) 황현 김도현 박하병 송주면 권룡하 유도발 이현섭 김근배 박능일 김지수 최우순 김영상 김제환 김성진 박무조 이학순 조장하 송완명 김천구 김영세 이근주 오강표 장기석(이상 유생) 이보철 (학생) 황돌쇠 (천민)

<매국의 수작자들>▲후작=이재완(대원군의 생질) 이재각 (완평군 이승응의 아들) 이해창 (경원군 이하전의 양자) 박영효 (철종의 사위) 윤택형 (윤비의 생부) 이해승 (철종조카·이재순의 손자)
▲백작=이지용 (전인군·이최응의 손자) 민영린 이완용
▲자작=박제순 권중현 이근택 (이상 을사5적) 고영희 이병무 이재곤 임선준 조중응 (이상 고종양위7적) 민영휘 이기용(대원군의 증손) 이용식(학부대신) 윤덕영 (윤비의 삼촌) 민병석 (일진회간부) 김성근 민영소 이근명 김윤식 조민희 (주불공사) 민영규 송병준 이하영 이완용
▲남작=이용봉 남정철 최석민 (독립협회원) 조동윤 민상호 (독립협회조직위원) 장석주 (한성순보주필) 박제빈(일진회간부) 이근상 한창수(이완용내각의 서기관장) 성기달 박기양(궁내부대신서리) 김사준 이건하 이재극 조의연 (군부대신) 이위영 김병익 김사철 정락용 민형식 정한조 윤웅렬 (군부대신·윤치호 부친) 박용대. 김가진 민종묵 (외부대신) 김종한 이봉의 김춘희 (김홍집의 조카) 민영기(군부·탁지부대신) 이용악 조경희 이정? 이종건 김학원 이윤용(대원군사위·이완용의 형) 김영철 이근호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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