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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현실 직시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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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가 유럽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었던 암울한 시절에도 비전을 잃지 않았다. 그는 흔들림 없는 비전으로 무장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했다. 처칠은 자신의 카리스마 때문에 나쁜 소식이 자신에게 전달될 때 좋은 내용으로 변형될까 걱정했다. 그래서 공식 명령 계통 밖에 '통계부'라는 완전히 독립된 부서를 만들었다. 통계부의 최우선 사명은 처칠에게 가장 냉혹한 현실을 조금도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는 전쟁 내내 통계부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면서 사실, 오로지 사실만을 거듭 물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갈채 받는 꿈 같은 건 필요 없다. 사실이 꿈보다 더 좋다."

베트남 전쟁 당시 8년간 하노이 전쟁포로수용소에 갇혔던 짐 스톡데일 장군은 언제 석방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포로들을 선전에 이용하려는 적군의 시도에 맞서 싸우며 가능한 한 많은 동료 포로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왔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스톡데일은 '결국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과 '가장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규율'을 함께 꼽았다. 그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채 믿음만 가졌던 낙관주의자들이 수용소 생활에서 견뎌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 것이라고 말하다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부활절에는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낙관주의자들은 결국 상심하다 죽었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도 나가지 못할 것이란 현실을 직시하라. 그렇지만 언젠가 반드시 나갈 것이란 믿음을 잃지 말라. 그래야 살아남는다'. '좋은 기업을 넘어…위대한 기업으로'의 저자 짐 콜린스는 이를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명명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엊그제 언론사 경제부장들과의 간담회에서 한국 경제를 위기로 생각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중소기업이나 농업, 자영업자 등의 어려움은 과거부터 계속된 구조적인 위기이므로 이를 한국 경제의 총체적 위기라고 하는 건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이달 초 청와대 경제정책비서관은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 경제가 기초체력을 다지고 회복세에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도의 경제 규모에서 4% 성장은 견고한 것이고, 내년에 5% 성장을 하면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 4위에 해당하는 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시절보다 지금이 더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또 여당 의장이 대통령의 임기 중 사퇴는 없다고 강조해야 할 정도로 정치권은 어지럽고 불법 도청 사건, 맥아더 동상으로 표상되는 이념 갈등, 삼성과 서울대 때리기 등 사회 곳곳에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대형 폭탄들이 산재해 있다. 경제가 가장 싫어하는 불확실성이 즐비하다. 이 때문에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면서 일자리가 늘지 않고 성장 잠재력이 약해질 상황에 놓여 있다. 게다가 저출산.고령화, 국제 유가, 중국의 거대화 등 국내외 여건은 우리 경제에 유리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앞장서 위기가 아니라고 떠들어 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을 안심시키고 힘을 내게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지, 지금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달콤한 레토릭이 아니다. 정부가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참여정부의 비전도 뚜렷하지 않다. 지난해 아시아개발은행(ADB)은 한국 정부가 경제 회생에 필요한 핵심 어젠다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개혁정책의 초점이 재벌의 투명성 제고나 분배 개선, 사회안전망 강화에 맞춰지면서 경제적 효율성이나 생산성이 등한시되고 이 때문에 경제 불안이 초래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책의 신뢰를 되찾아야 투자가 되살아나고 한국 경제가 회생할 수 있다는 충고다.

비전과 확신에만 매달린 채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가장 확실하게 실패하는 길이다. 아무리 원대하고 분명한 비전과 확신을 갖고 있는 리더라도 진실을 듣고 냉혹한 사실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현실을 외면하고 곧 사라질 거짓 희망을 제시하는 것은 조직을 망가뜨리고 사기를 꺾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이세정 정책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