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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쌀값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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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우리나라는 식민지시대에 쌀 생산의 과반을 일본에 이출하고 만주산 잡곡을 주식으로 해야하는 민족적 비애를 겪기는 했으나 그러한 외생적 요인을 차치한다면 쌀수급에는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과 6·25이후의 인구급증과 생산부진으로 국내수급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원조곡 등으로 들어온 찰기 없고 푸석푸석한 안남미(인디카에 속하는) 밥상을 받아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재배되어왔던 재래종이나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도입품종은 모두가 쌀모양이 둥글고 찰기가 있어 우리의 기호에 맞는 재포니카 쌀로서 이른바 경기미와 호남미 등의 근소한 등급차는 있으나 식물생태적인 특성이나 소비자의 선호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60연대말께부터 주곡자급의 목표달성을 위해 정부주도아래 강력히 추진된 통일계 신품종의 개발보급은 수량증가 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미질(적어도 소비자가 인식하는 한에 있어서의)이나 품종의 기술적 안정성의 면에 있어서는 아직도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미와 정부미, 재래종과 신품종이라는 이분법이 어느 틈에 생산자, 소비자, 정책당국을 포함한 모든 이행당사자들간의 공통어로 되었으며, 이러한 구분은 암암리에 정부미보다는 일반미가, 신품종보다는 재래종이 낫다는 함축과 합께 쓰이게된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되고 말았다.
그러면 정부미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이는 아마도 해방직후 미군정초기의 양곡에 대한 전면통제가 실패하면서 양곡관리법을 토대로 한 부분통제로 이행함에 따라 일부의 자유시장 유통미 이외에 정부가 관수 및 곡가조절을 위해 양곡을 보유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후 정부는 농민으로부터의 일반수매, 양비교환, 농지세물납, 외곡도입 등의 수단으로 정부미를 확보해서 각종 관수에 충당하는 동시에 자유시장의 수급 및 가격조절을 위해 방출함으로써 정책의지를 반영해왔던 것이다.
한편 l960연대 이래의 급속한 산업화의 물결과 소독수준 향상에 따라 쌀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예컨대 경제기획원이 조사한 전 도시가구의 소비지출 중 곡물(그중 대부분이 쌀임)의 비중은 1963년의 33.9%에서 70년의 17.4%, 80년의 12.3%로 크게 저락했으며 왕년에는 도매물가지수 중 단일품목으로 최대의 가중치를 가졌던 쌀의 영광을 석유에 물려준지도 오래여서 75년 기준지수에서의 미맥의 가중치는 6.96%에 불과하다.
평균적인 국민경제속의 지표가 이러할진대 고소득층의 총 지출중 쌀의 비중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으며 공해식품의 우려가 짙은 화학비료를 쓴 시중 쌀 대신 유기질 비료만을 쓴 무공해 쌀을 주문해서 먹는다는 말은 이미 해묵은 이야기가 되고있다.
또한 그동안 꾸준히 증가되어 왔던 1인당 쌀소비량도 70년대말의 연간 l백30㎏ 수준을 피크로 감소추세로 역전되기 시작했으며 분식선호경향이 높은 청소년인구 층의 성장에 따라 쌀 수요의 전망은 쌀 편애로부터 점차 쌀에 대한 외면 쪽으로 한걸음 한걸음 바뀌어 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생산농가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미작은 농업소득의약 50%, 농가총소득의 35%를 점하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소비자 가계에 비해 쌀값에 의한 농가경제의 지위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되어 있다. 이러한 간단한 검토를 토대로 쌀값을 통해 농가소득을 지지해야한다는 단순한 논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농가입장에서의 쌀값이 지니는 의미의 중대성은 충분히 인식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쌀의 정부수매가격 결정은 정부와 농민간뿐 아니라 정부안의 농정당국과 예산(또는 물가)당국간에 연례적인 쟁점으로 되어왔으며, 근년에는 수매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방출한다는2중미가제가 인플레이션과 재정적자의 요인으로 된다고 해서 마치 높은 생산자미가가 국민경제 안정에 주름살을 주는 양으로 오해될 우려조차도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재정적자의 원인은 2중 가격의 결정 때문이지 생산자가격이 지나치게 높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며,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되는 것은 2중미가제 때문이 아니라 그에 소요되는 재원조달이 한은차입 등 인플레적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지면의 제약으로 최근 논의되고있는 쌀값대책에 관한 소견을 제시함으로써 이 글을 맺을까 한다.
첫째로 현행 양곡관리제도는 자유시장의 기능을 살리면서 그 약점을 보완해 가는 부분관리제도로서 전 유통량을 정부기구가 관장하는 전면관리제도와는 그 정신을 달리한다는 점이 정확히 인식되어야할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 입장에 선다면 정부의 쌀값대책은 정부미의 관리를 수단으로 해서 시장가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간접적·유도적 정책에 중점을 두고 지나치게 직접적인 전면가격 통제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높은 가격을 지불할 용의와 능력을 지닌 일반미 선호의 고소득층을 위해 전면가격통제를 실시하는 시책의 경제적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한번 냉정히 생각해볼 여유를 가져야 할 것 같다. 가령 서민생활의 안정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정부미나 혼합곡의 염가공급만으로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최근의 양곡상 단속은 양곡상의 탈법이나 부도덕 행위에 치중되는 듯하나 정책의 기본선은 현행 제도의 허점 또는 미비점에 대한 규명에서 출발되어야 할 것이다.
관견으로는 오늘날의 쌀값대책의 최대의 약점은 품질에 따라 다른 값이 매겨지는 시장경제의 원칙이 존중되지 않는데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쌀정책은 수매에서부터 생산비와 품질이 다른 종류의 쌀의 같은 가격으로의 수매, 소비자 취향의 고급화를 간과한 채 물량확보만을 위한 다수확품종의 증산드라이브, 불합리한 도입양곡관리 등에 관한 재검토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며, 단기적으로는 당국은 가능하지도 앓은 쌀값의 전면통제에 대한 확신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선별하는 지혜를 짜내는 일에 더욱 노력해야할 것이다. 정영일<서울대사회대 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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