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청<136>자유당과 내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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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대통령시대의장관기용에서 자유당이 중심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통된 얘기다.
신두영씨는 이박사는 파벌을 경계했고 자유당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있다.
『이박사는 파벌을 경계했고 힘의 균형을 유지시키는데도 배려를 했다. 족청이거세될 우렵인데 이기붕과 사이가 나빴던 원용헉헌병사령관도 족청계로서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러자 이박사는 일부러「진충보국」이라는 휘호를 써어 원용덕에게 전해주고 그 소문이 상대방에들어가게 함으로써 원이 신임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라고 그 예를 들었다.
인사문제에서도 장관기용은 자유당과 무관한 인사라고 했다.

<서대문에 메모연락>
『후기에 들어「서대문 경무대」라 불렀을 정도로 이기붕국회의장의 영향력이 큰 것으로 소문났지만 내막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대통령은 장관교체때 비서를 시켜 인사메모를 국무원에 내려보내는데 이때 박찬일비서가 인사내용을 곧바로 서대문에 알렸다. 그래서 서대문은 당사자에게 한발앞서 장관기용을 알려주게 되고 그것이 마치 인사를 결정한양 알려진다. 물론 대통령과 접촉할 기회가 많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사람을 추천하기도 했지만 그 추천은 대통령의 평점안에 든 사람이라 야지 독자적 추천이란장관기용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이박사는 때로 토요일 하오 늦게 인사메모를 내려보내기도 있는데 이때는 곽영주경무관등 경호원이 심부름을 맡았다. 그럴 때는 서대문에선 장관교체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경무대비서진에선 토요일 하오에 자리를 비우면서 혹시 인사발령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국무원에 부탁을 하기도 했다』고 있다.
이박사는 많은 사람에게 인재에 관한 정보를 듣고 참고는 했지만 정작 자리는 그가 결정했다.
농림장관을 거쳐 국회부의장을 지낸 임철호씨의 회고도 이를 말해준다.
『이박사는 비서들에게 인사에 대해서는 가볍에 묻기만했다. 하지만 백두진만은 내가 시험까지 해보고추천 장관이 된 유일한 예다. 부산피난 시절 최순주재무장관이 외환관리나 무역문제에 시원치않자 어느 날 재무부 관계서류를 결재할때「최장관이 미국에서 나와 함께 있기도 했지만 경망해 일을 저질러. 재무장관감이 없나」고해 백두진을 추천했다.
백두진과는 부산 남포동 직산은행장실에서 두차례 만났는데 상과로는 일본에서 최고로 치는 동경상대를 나오고 여러 가지로 괜찮은것같았다.
나는 그 뒤 백두진을 이박사에 추천한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뒤에 오히려 백두진 때문에 비서자리에서 물러났다.
백장관 취임 1∼2개월 뒤 재무부에 큰 문제가 생기자 나를 송도의 요리집으로 초청, 식사를 하면서 어디선가 내가 자기를 추천했다는 말을 들을 듯「내가 이고생을 하는게 임비서때문」이라고 하소연했다.

<임철호, 백두진추천>
이런 탓에선지 백두진장관은 나를 한은총재로 추천한적이 있다. 당시 어떤 신문에서 나를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부여출신의 모인사식으로 나의 추천을 보도하자 당시 한은부총재 였던 장기영이 「은행는 법률가가해서는 안된다」고 이박사의 고문인「올리버」에게 이야기해「올리버」가 이박사를 설득, 나의 한은총재설은 설로 끝났다.
당시 장기영은 수출입 외환관계·대부문제등이 잘 알풀리는 것이 경무대에서의 나의 역할때문으로 안탓에서 인지 내가 총재가되면 큰 일이라고 생각했던것같다.
이박사는 외환관리와 은행단속등을 염두에두고 나를 고려했던것같다.
뒤에 이박사는 「공연히 나무위에 올려놓고 흔들었다」고 미안해 했다.
백장관은 언젠가는 내게「임비서 박사학위를 받을 방도가 없겠소」라고 물어와 웃고 넘기고 말았지만 상당히 권력과 자리에 집착했었다.
나는 48년 겨울인가 49년초에 만송의 추천으로 경무대를 들어갔다.
첫 번째로 비서직을 그만둔 것은 6.25 1주일전 갑자기 이박사가 결재 도중「자네 임영신 사건의 재판장에게 가서 3년 징역 주라고 했다며」라고 하며 비서를 그만 두라고해 아무 변명 않고 이튿날부터 나가지 않았다.
이박사는 이것을 김장흥씨를 시켜 조사를 했는데 모함으로 밝혀져서인지 대전을 내려가 있는 동안 다시 비서로 출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차관인사엔 당관여>
두 번째로 비서직을 그만 둔 것은 백장관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화폐개혁 당시의 일이다.
그때는 정부의 일부는 부산에 있고 이박사는 서울로 환도한 탓으로 백장관이 개혁안 서류를 끼고 서울까지 와 보고하곤 했다.
이박사는 경제등 어려운 문제가 있을때는 타이프로 편지를쳐 일본있는 친구들의 의견을 묻곤했는데 화폐개혁도 자문을 구했었던지는 몰라도「경제는 순리적으로 풀어야한다. 화폐의 양을 억지로 줄여서는 안된다」면서 화폐개혁을 승인할 때 1백원을 1원으로 호칭의 변경만을 인정했을뿐 예금의 동결등 다른 조치는 금지시켰었다.
그것을 재정전문가들이 근시안적으로 「그러면 하나마나다. 예금을 동결하지 않으면 헛화폐개혁」이라고 이것을 결재안에 넣어 직접대통령에게 가지고 갔다.
그러자 이박사가「내가 언제 이렇게 하라고 했느냐」며 화폐개혁안을 내동댕이 친 것을 나와 고재봉이 보았다.
이것이 화근이되어 화폐개혁 단행전에 은행에서 예금이 유출되어 나가자 이박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는데 백재무가「비서실에서 화폐개혁설을 국회에 퍼뜨려 이 난장판입니다.」고 보고했다.
신두수씨는 차관급과 도지사엔 자유당의 영향력이 다소 미쳤고 인사난맥은 국회에도 원인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박사는 차관급이하는 각부장관이나 다른 정치인들 얘기를 듣고 인사발령를 했기 때문에 자연히 자유당의 입김이 미치고 있었고 행정에 영향를 주었다. 특히 지사급이하의 인사에서 각부장관들은 자유당의원들의 인사부탁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국회의 대정부공격이면에는 이러한 인사청탁에 대한 압력도 깔려있게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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