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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4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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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박 선생님 아니세요….

- 아니, 선생님 어디 가십니까?

이성부와 내가 그의 심상치 않은 행색에 놀라서 거의 동시에 말을 걸고 인사를 하고 그러는데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 음, 내 중요한 일이 있어서 저 건너 신문사에 가는데, 자네들 점심 먹었나?

- 예 저희는 먹었습니다. 선생님 식사하셔야죠?

그랬더니 박봉우는 의외의 말을 했다.

- 시장한데 나 곰보빵이나 사주어.

난데없이 웬 곰보빵, 이성부와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여튼 우리는 지하도 건너자마자 오래 전부터 있던 무과수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점심 무렵에 사무실 많은 광화문 근처 제과점에 빵 먹으러 들어오는 어른들이 있을 리가 없어서 안에는 가게를 지키는 십대 소녀뿐이었다. 오후나 되어야 하학 길의 고교생들이나 부근에서 약속 장소가 마땅찮은 아줌마들이 들를 것이다.

- 여기 우유 한 병 하구 소보루빵 좀 다오. 크림빵도 좀 섞어서 응?

우리는 접시에 가득 가져온 빵을 집어 우유를 마셔가며 정신없이 먹고 있는 박 시인 앞에서 침묵하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우선 복장이 철에 맞지 않게 여름날 동네에 마실 나왔다가 길 잃은 치매 노인 행색이고, 그가 옆구리에 잔뜩 끼고 와서 빵 접시 곁에 올려놓은 것은 일간신문들이었다. 그냥 가만있을 것을 이성부가 공연히 신문을 들추어보며 말을 시켰다.

- 아니 이 신문들은 다 뭡니까. 보시려구 산 거예요?

하자마자 박봉우의 음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신문을 펼쳐 일면의 커다란 제목들을 읽어 나갔다. 그가 펼친 어느 신문에는 '미친 개에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제목도 보이고 '핵을 써서라도 강력한 응징을'이라는 제목에서 그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소문대로 예의 그 비정상적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 아, 이런 천하에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이 삼천리 금수강산에 외세를 시켜서 핵폭탄을 터뜨리자네. 거기 누가 사는데, 이 땅이 뉘 땅인데?

하더니 그는 갑자기 의자 위로 올라서서 '동포 여러분!' 하면서 연설을 시작했다. 사실은 바로 그 전날에 판문점에서 미루나무를 베어내려는 미군 측과 북한 병사들 사이에 실랑이가 일어났고 북한 병사가 도끼자루를 휘둘러 미군 두 명이 머리를 맞고 타살 되었던 것이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얼마 전에 국제 심포지엄 후속행사로 외국 작가들과 함께 판문점을 방문했을 적에도 안내인은 여러 가지 비무장지대의 역사를 나열하면서 아직도 당시의 선정적인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름 하여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다. 나무를 베려던 쪽은 사계청소를 하려던 미군 측이었고 그것은 우리네 국토에 자란 나무이니 벨 수 없다고 반발한 것은 북한 측이다. 어찌 보면 전쟁터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죽었으니 문제지, 동네의 젊은이들 혈기로도 패싸움이 될 만한 조건이었다. 그런 일에 모든 신문들이 나서서 미국 보고 핵 폭탄을 떨어뜨리자고 하는 게 제 정신 가진 놈들 짓이냐고 박봉우는 외치고 있었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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