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달라진 대기업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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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23일 서울 마곡산업단지에서 열린 LG사이언스파크 기공식에 참석했다. 개별 대기업의 행사에 참석한 건 2013년 2월 취임 후 처음이다. [중앙포토]

“저만 웃는 것 같네요.”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12월 26일 당선인 자격으로 재계 총수들과 첫 상견례를 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할 때 했던 말이다. 실제로 허창수(GS그룹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등 이날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 모인 대기업 회장 17명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거의 없었다.

 경제민주화가 대선의 화두였던 까닭에 긴장감이 흐르는 건 예견된 일이었지만 이날 상견례 분위기는 예상보다 냉랭했다.

 전경련에 앞서 중소기업중앙회를 먼저 방문한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선 “중소기업 대통령이 되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날 총수들 면전에선 “대기업이 성장하기까지는 많은 국민의 뒷받침과 희생이 있었고 국가의 지원도 많았기 때문에 국민기업의 성격도 크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기념 촬영이 이어지니 박 대통령 혼자만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정부 출범 2개월 전부터 대기업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 박 대통령은 한동안 대기업과 불가근(不可近)의 관계를 유지했다. 박 대통령은 2013년 3월 11일 취임 후 처음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각종 주가조작에 대해 철저히 밝혀서 제도화하고 투명화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표면적으론 주가조작을 언급했지만 내심은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를 염두에 두고 경고한 것이란 해석이 많았다.

 청와대와 대기업의 긴장관계 속에서 특히 CJ가 단골 비판 대상으로 등장했다. CJ를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CJ를 겨냥하는 듯한 발언이 수차례 이어졌다.

 박 대통령은 미국에선 흥행했지만 국내에선 상영관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고전한 국산 애니메이션 ‘넛잡’을 지난해 1월 직접 관람했다. 그 자리에서 문화계 인사들로부터 대기업의 횡포를 전해 들었다. 박 대통령은 당시 “말이 안 통하는 미국에 나가서도 개척에 성공한 업체를 정작 우리나라에서 재벌 기업들이 어렵게 만드는 게 말이 되느냐”고 안타까워했다. CJ가 영화 배급사를 장악해 중소 배급사가 설 자리가 줄어든 걸 비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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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뒤인 지난해 2월 미래창조과학부와 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에선 “최근 방송시장에 진출한 대기업들이 수직 계열화를 통해 방송채널을 늘리는 등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다”며 CJ의 채널 독점 문제를 지적했다. 지난해 4월 문화융성위원회 회의에선 “영화산업의 경우 동반성장 협약을 제정했지만 합의사항을 어기거나 계열사 밀어주기 관행도 나타났는데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지시했다. 3개월 사이 CJ에 대해 융단폭격 하듯이 한 셈이다.

 대기업 총수에 대한 사법 판단도 엄격해졌다. 검찰은 2013년 1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횡령 혐의로 기소했다. 최 회장은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이재현 CJ 회장 또한 횡령 혐의로 기소했다. 이 회장은 지난해 9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받고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과 박근혜 정부의 관계는 요즘 들어 ‘불가근’에서 ‘불가원(不可遠)’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가뜩이나 나빴던 체감경기가 더 악화되면서다. 현금이 많은 대기업이 투자를 늘려 경기활성화에 도움을 줄 필요가 절실해졌다.

 박 대통령의 동선에 먼저 변화가 생겼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서울 마곡산업단지에 LG가 4조원을 투자하는 LG사이언스파크 기공식에 참석했다. 개별 대기업 행사에 박 대통령이 참석한 건 취임 19개월 만에 처음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경제혁신은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기업과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와 노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투자를 독려한 것이다. 정부와 대기업이 1대1로 파트너십을 맺은 ‘창조경제혁신센터’를 고리로 삼성·SK·두산·효성 등의 대기업 행사에 잇따라 참석했다.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이 든든한 멘토와 등대 역할을 할 것”이란 립서비스도 했다.

 CJ에 대한 박 대통령의 태도도 달라졌다. 박 대통령은 관객 동원 17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명량’을 지난해 8월 관람했다. 명량은 CJ가 투자와 배급을 맡은 영화다. 박 대통령이 찾은 상영관도 CJ가 운영하는 영화관이었다. 영화 산업의 계열사 밀어주기를 비판하던 4개월 전과는 다른 행보였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18일에는 CJ 계열의 방송사가 방영한 드라마 ‘미생’을 거론하며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면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 세대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올해 더욱 대기업에 가깝게 다가갈 것으로 보인다. 올해는 박근혜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원년이다. 청와대는 올해를 경제 재도약의 마지막 골든타임으로 생각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기업은 투자와 고용의 핵심 주체”라며 “‘비즈니스 프렌들리’ 쪽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허진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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