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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변신 선언한 박병무 플레너스 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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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1970년대 서울대 수석합격자들의 인터뷰 내용은 판에 박은 듯했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습니다. 과외는 받아본 적 없습니다. 잠은 하루에 5시간 이상씩 꼭 잤고요."

이런 대답은 범상한 수험생들과 그 부모들에겐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79년엔 달랐다.

당시 서울 대일고 졸업을 앞두고 있던 서울대 수석합격자 박병무(朴炳武.42.플레너스 엔터테인먼트 고문)씨는 고득점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의외의 답을 했다. "저, 고2 때부터 그룹과외를 받았는데요…."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우연이었을까. 이듬해 등장한 신군부는 정권을 잡자마자 '과외 절대금지'라는 칼을 휘둘렀다.

"그해 아버지께서 한국전력에서 정리해고를 당하셨어요. 저 때문이었죠."

그로부터 3년 뒤. 朴씨는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법조인보다는 기업인을 꿈꾸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대벌(大閥)'등 당시 유행하던 '기업 성장소설'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는 일. 사법고시를 치렀고 행인지 불행인지 덜커덕 붙어버렸다. 부모님께 체면을 세웠다고 생각한 그는 마음껏 경영학 과목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사법연수원과 군생활을 마치자 진로를 결정할 때가 왔다. 연수원 졸업 성적은 훌륭했다. 전체 5등. 판사든 검사든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례적으로 로펌(법무회사) 변호사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가족들은 "기왕이면 판.검사를…"하고 말을 꺼냈지만 朴씨의 고집 앞에 손을 들어야 했다.

시간은 다시 흘러 2000년 가을. 가족을 '배신'했던 朴씨는 국내 최대규모 로펌인 '김&장'에서 기업 인수.합병(M&A) 분야 최고 전문가로 성장해 있었다.

한화종금.OB맥주.제일물산 등 굵직한 M&A 뒤에는 늘 그가 있었다. 적대적 인수를 맡으면 가혹하게, 우호적 인수에 참여하면 순조롭게 일을 풀어내는 그를 보고 재계에선 '기업 사냥터의 중재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가 "돌연 벤처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직접 기업을 맡겠다"고 나섰다. 그것도 영화.음반제작 같은 '딴따라 사업'을 하는 기업이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말에 가족들은 또 다시 불안해 했다. 로펌에서도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뛰쳐나왔고 '중재자'에서 '사냥꾼'으로 옷을 갈아입은 지 1년여 만에 플레너스 엔터테인먼트사를 중견기업으로 일궈냈다.

현재 국내 영화배급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시네마 서비스', 온라인 게임계의 최강자 '넷마블' 등의 회사가 모두 플레너스의 휘하에 있다. 올해 예상 순익은 2백50억원 정도.

기업소설의 주인공처럼 성공을 이어온 인생이었다. 하지만 막상 만난 그는 '도도한 엘리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꾸만 이력을 들추는 질문에 "중요한 순간마다 주변 분들 충고 잘 안 듣고 고집을 부렸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다"고만 말을 받았다.

지난 달 모교의 초청으로 후배들 앞에서 했던 특강에 대해서도 자신이 배급에 참여했던 영화 제목을 빌려 '가문의 영광'이라며 황송해했다.

그런데 내친 김에 고정관념을 하나 더 깨겠다는 것일까. 그는 최근 "조만간 플레너스를 떠나 금융권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모 은행의 지주회사인 외국계 투자사에서도 朴씨를 CEO로 영입하겠다고 나섰다. 자리를 옮긴다면 국내에선 드물게 변호사 출신으로 정통 금융권에서 활약하게 되는 셈이다.

"한 마을을 평정하고 다음 마을로 떠나는 '바람의 파이터' 같다"는 말에 그는 "곧 실업자가 되니까 먹고 살 궁리로 바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곧바로 포부를 자신있게 밝히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정통 금융권에서도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건강한 자본' 탄생에 기여하는 산파가 되고 싶습니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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