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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나는 미생일까 사자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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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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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풍경1 : 어릴 적 마루에 한자가 적힌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獅子窟中無異獸 (사자굴중무이수)’. 구산 스님의 붓글씨였습니다. 구산은 ‘해인사 성철-송광사 구산’으로 불리던 당대의 선지식이었습니다. 뜻은 간단했습니다. ‘사자 굴 안에는 다른 짐승이 없다.’ 무슨 뜻일까요. 사자는 동물의 왕입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사자가 사는 굴에는 다른 짐승이 살 수가 없습니다. 당연하지 않나요?

 그래도 조금 궁금했습니다. 그럼 저 액자를 왜 벽에 걸어놓았을까. ‘여기는 사자가 사는 굴이니 감히 나쁜 액운이 들어올 수 없다.’ 저는 그 정도로만 이해했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사자굴중무이수’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더군요.

 #풍경2 : 독립운동가로도 유명한 백용성 선사는 제자 고암 스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처가 가섭에게 연꽃을 들어보인 까닭이 무엇인가?” 고암이 답했습니다. “사자 굴에는 다른 짐승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대목을 읽다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자굴중무이수’라는 글귀를 이런 데서 만날 줄 몰랐거든요. 뜻밖이었습니다. 더구나 용성 스님은 이 물음 끝에 제자의 공부를 인가했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은 다들 ‘꿈꾸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가 근사한 동네의 높다란 아파트일 수도 있고, 바다 건너 이국땅의 푸른 초원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종교에서 말하는 서방정토나 천국일 수도 있겠네요. ‘그곳에만 가면 나는 참 행복할 텐데….’ 그렇게 꿈을 꿉니다. 저는 그런 곳이 사자 굴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갈 수가 없습니다. 사자 굴에는 사자만 사는 법이니까요. 달팽이로, 토끼로, 염소로, 까치로, 여우로 각자 살아가는 우리는 근처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설사 굴 안에 들어간다 한들 살아서 나오기나 할까요. 그래서 꿈만 꿉니다. 갈 수 없는 땅을 향해 그리움만 영원히 쏟아낼 뿐입니다.

 다들 ‘미생(未生)’이라고 자책하며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토끼라고, 여우라고, 염소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대리에서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임원이 되고, 사장이 되면 미생에서 벗어날까요. 절대 갑의 자리에 서면 정말 ‘완생(完生)’이 되는 걸까요. 삶의 애환으로부터 자유로워질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대기업 회장이라 해도 그런 방식을 통해서는 미생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요. 붓다는 세상의 모든 ‘미생’을 향해 힌트를 줬습니다. 네가 바로 연꽃이라고. 네 옆의 사람도, 네 뒤의 사람도, 이 산도, 저 강도, 온 세상이 온통 그렇게 피어 있는 연꽃이라고 말입니다. 그걸 일러주기 위해 한 송이 연꽃을 들어보였습니다.

 고암 선사도 삶에 지친 ‘미생’을 위해 답했습니다. 사자 굴에는 다른 짐승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는 이 산과 저 들과 이 거대한 우주가 모두 사자 굴이라고 말합니다. 알다시피 사자 굴에는 다른 짐승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럼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일까요. 대체 누구이기에 이 무시무시한 사자 굴에서 숨을 쉬며 살아가는 걸까요.

 여기에 큰 열쇠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자입니다. 토끼인 줄 알고, 미생인 줄 알았던 우리가 사자입니다. 굴의 주인입니다. 붓다도, 용성 선사도, 고암 선사도 그렇게 역설합니다. 우리가 연꽃이고, 우리가 사자라고. 그래서 사자 굴에는 다른 짐승이 없는 거라고 말입니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나는 분명히 ‘미생’인데, 붓다는 “아니다. 너는 분명 사자다”라고 합니다. 누구 말이 맞는 걸까요. 여기에 물음을 던질 때 우리는 비로소 ‘미생’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게 아닐까요. ‘미생일까, 사자일까. 과연 나는 누구일까.’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