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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없이 「잘 그리기만 하면」되는 미술대학입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중학부터 대학까지 동창인 친구의 딸이 이번에 미술대학에 응시했다. 친구딸은 소묘의 명암처리, 동양화연의 강약이 독특해 동창들사이에도 관심을 갖는 학생이었다.
친구는 말의 기법이 다른 학생과 유별나 걱정스럽다며 불안해했다. 친구의 조바심을 달래느라 『걱정말라』고 하면서도 실상 나자신도 은근한 불안감을 떨치기는 어려웠다.
작년에 처음으로 서울에서 미술실기 공동채점이란 것을 해봤다. 소묘와 수채화가 학생들의 운을 결정짓는 심각한 시간이었다.
그많은 수채화와 소묘들이 천편일률적인 기법으로 다뤄지고 있음을 보았을 때 나는 크게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개성이나 특성이란 눈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 없고, 마치 「꾼」들처럼 기교만 열심히 익혀낸 응시작들을 대한 다음 순간 나는 분노보다 서글픔이 앞섰다.
고교교과과정이 입시위주로 짜여져있어 일반과목에 비해 예능과목은 거의 전무한 상태다. 따라서 미술대학지망생들은 부득이 소위 미술학원이라는데서 입시를 위한 실기를 익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 미술학원이라는 데가 짧은 시간안에 기능공을 만들어 내는 식의 지도를 하고있으니 참으로 문제는 심각하다.
실기평가에서 나타나는 작품의 우열은 재질이나 능력의 차이라기보다 누가 더 맹훈련을 쌓았느냐에 귀결되는 것 같은 느낌이 나의 첫 채점인상이었다.
공동관리로 배정된 S대에서 『평가기준을 어디에 둡니까?』라는 질문에 『배정된 다섯교수께서 의논하셔서…』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서글픔은 시작됐다고 봐야 옳으리라.
선정된 학생들은 앞으로 4년간 미술교육을 통해 전문미술인으로 성장할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대학마다 뚜렷한 미술교육의 이념과 목적과는 상관없이 그저 「잘그리기만 하면」되는 것이다.
주어진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외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이러한 평가방법이 과연 미술학도들의 내재된 독창성이나 창작능력의 가능성을 판가름할 수 있는 정확하고 공정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인지.
또 소재만해도 그렇다. ◀반드시 소묘는 원래 조각과는 거리가 먼 생명감없는 석고를 그려야만하고, 색채구성은 칸메우기식의 양시화된 장식적 수법이 반복되어야만 하는가.
한번은 시험삼아 Y대미술과 1학년 소묘시간때 한부분에 구멍난 석고를 뉘어놓고 4시간짜리과제를 주었더니 학생들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몰라 쩔쩔매고만 있었다.
신입생에게 입시준비로 오도된 상투적 습관을 버리도록 하는데 거의 1년이 걸린다해도 지나친 과장은 아니다.
천편일률적인 기법을 답습하는데만 치중하여 개성도 없고 상상력은 더욱 엄두도 못내본 상태에서 「자유로운 표현」이란,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하물며 자신의 작업을 창조함에 있어서랴.
한국과 미국의 미술대학 1년생을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타난다.
입학당시 한국학생들은 기술적인 면에서 단연 미국학생들을 앞지른다. 그러나 독자적인 사고력과 이를 응용할 수 있는 상상력의 결핍은 4년후 상당한 격차를 빚어내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미국학생들이 나름대로 「자기것」을 찾아 자신의 기준과 확신을 갖고 작업하는 정신으로 졸업하는 반면, 한국학생들은 거의 예외없이 방황속에서 아무것도 설정하지 못한채 졸업을 맞게되는 것을 나는 많이 보았다.
이것은 한국미술교육 전반에 걸쳐(특히 대학입시때는 더 지독하다)기술적인 연마에만 치중하고 독창성 훈련이 결여된 것을 입증하는 좋은 예가 아니고 무엇이랴.
개성이 죽어버린 화면을 요구하는 현대입시에서 친구의 딸이 과연 제대로의 평가를 받을수 있을는지 걱정하면서 모형 찍어내는 듯한 기법에서 탈피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새로운 평가방과 평가기준이 모색돼야 하리라고 생각해본다.
최욱경
◇약력 ▲1940연생 ▲서울대미대회화과·미크랜브룩미술대학원졸업 ▲한국현대미전출품 및 로스웰미술관 초대작품제작 ▲한국·미국·캐나다·중국·노르웨이 등서 개인전 ▲미프랭클린 플리어스대 및 영남대교수 ▲현덕성여대 서양화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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