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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없는 자신감이 더 큰 화를 부른 구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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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권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최종권
사회부문 기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유. 움직이지도 못허구 돼지를 내다 팔지도 못하고 아주 죽것슈.”

 충북 진천군에서 30년째 축산업을 하고 있는 김장호(60)씨는 “요즘 하루하루가 전쟁 같다”고 했다. 3년 전 구제역으로 돼지 40마리를 땅에 묻었는데 또다시 애꿎은 돼지를 살처분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김씨의 농장은 지난 3일 올해 첫 구제역이 발생한 농가와 겨우 15㎞ 떨어져 있다. 그는 “공무원들이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백신 접종을 했는데 왜 자꾸 구제역이 발생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구제역이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정부 방역체계에 구멍이 뚫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첫 발생 후 20일이 지났지만 방역 당국은 어디로 확산될지 가늠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4일 구제역 확진 판명이 나온 날만 해도 방역 당국은 “2011년 같은 구제역 악몽이 재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구제역은 확산일로다. 진천군의 한 농장에서 발생한 구제역은 충북 청주시와 음성·증평군을 넘어 충남 천안시까지 확산됐다. 살처분한 돼지만 1만6500마리를 넘어섰다.

 그럼에도 농림축산식품부와 충북도 등 방역 당국은 안이한 대처로 일관하고 있다. 올해 발생한 구제역 바이러스가 2011년 이후 대부분의 축산농가가 정기 예방접종을 해 온 ‘O형’으로 확인됐다는 터무니없는 자신감 때문이다. 그래서 충북 지역의 모든 양돈농가에 이동제한조치를 취한 것도 지난 16일 구제역이 천안까지 확산된 뒤였다.

 더 큰 문제는 예방접종 여부를 감시하는 시스템조차 없다는 점이다. 1000마리 이하를 키우는 농가는 시·군별로 담당자 1~2명이 순회하며 체크하는 정도고 그 이상은 농장주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실제로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진천의 S농장은 1만4000여 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있지만 사육 돼지 수의 4배가 넘는 6만4000마리분의 예방접종을 한 것으로 신고돼 있었다. 하지만 이런 예방접종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는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충북도 관계자도 “백신 구입장부를 통해 예방접종 유무를 파악하는 수준”이라고 말할 정도다.

 농식품부도 같은 입장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전국에 있는 1000여만 마리의 돼지에게 예방접종이 됐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느냐”며 “예방접종은 기본적으로 농장주에게 맡기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예방접종이 구제역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면서도 일선 농가에서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감시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게 방역 당국의 현주소인 셈이다. 그러는 사이 땀 흘려 돼지를 키워 온 농민들의 속만 타들어가고 있다.

최종권 사회부문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