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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오늘 밤 산타는 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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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한글을 깨친 미취학 자녀가 있는 분은 이 글을 읽는 즉시 가위로 오려내 폐기 처분하시길 권합니다.)

 산타의 정체를 알게 된 건 대여섯 살 때쯤이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퇴근한 아빠가 마루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당황하며 무언가를 허겁지겁 장독대에 숨겼다.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한 걸 보면 충격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아, 어쩐지 이상했어. 산타는 아빠였구나…. 물론 지혜로운 어린이답게 아빠에겐 모른 척했다.

 지난주 인터넷에서 귀여운 가정통신문을 발견하고 이 기억을 떠올렸다. 한 유치원에서 학부모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Santa 訪問에 관한 안내문’이란 제목이 적혀 있고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어진다. “이 안내문을 英語와 漢字를 섞어서 쓰고 봉해 보내는 이유는 우리 어린이들이 Santa에 대한 神秘感을 지니게 하여 동심의 즐거운 追憶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영어·한자·산타·신비감·추억 등의 단어를 일부러 영어와 한자로 적어 아이들이 혹시 이 안내문을 발견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배려다. 내용인즉슨, 아이들이 산타 앞으로 쓴 카드를 부모님들께 보내 드리니 카드에 적힌 아이의 희망 선물을 체크해 미리 준비하시라는 거다.

 뭐 이렇게까지 하면서 산타의 존재를 믿게 해야 하나, 쿨한 마인드의 부모님이 있을까 봐 덧붙인다. 미국의 뇌과학자 켈리 램버트 박사는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산타의 존재는 아이에게 마음의 예방접종과 같다”며 산타의 선물이라는 픽션을 가능한 한 오래도록 아이의 마음속에 남겨 두라고 조언했다. 사람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허구와 사실을 구분하게 되지만 뇌 속에는 시간여행(mental time travel)을 위한 시스템이 내장돼 있어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행복했던 과거의 감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되새김할 수 있는 좋은 기억은 많을수록 좋다.

 램버트 박사의 경험을 참고하자. 3세, 7세의 두 딸이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시점 다락에 숨겨 놓은 선물을 발견했다. 엄마는 아이의 믿음을 지키려 필사적으로 둘러댄다. “산타가 등이 아파서 크리스마스이브에 배달할 선물을 미리 소포로 부쳐 줬어. 크리스마스 전에 열어 보면 도로 가져간다고 계약서에 서명도 했단다.” 그러니 올해 크리스마스도 산타 지키기에 전력을 다할 일이다. 조금 더 크면 만나게 될 험한 세상을 견딜 힘을 비축해 주는 것. 그것이 웃을 일 별로 없는 세밑을 사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인 것 같아서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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