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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소리 없는 세상에서, 희망이라는 빵을 굽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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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세살배기 아들을 안고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죽고 싶었다. 그 아들은 어린 시절부터 엄마가 울기만 하면 무조건 “나 때문에 우는거냐,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베이커리의 안준호(36) 셰프 모자(母子) 얘기다. 안 셰프는 이 호텔의 유일한 청각장애인이다. 젊지만 벌써 입사 12년차로, 야간조 셰프 3명 중 가장 고참이다. 선배의 지시를 빨리 수행하고 동료들과 수시로 소통해야하는 긴박한 호텔 주방에서 아무 것도 듣지못하는 청각장애 2급 장애인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장애인이 아무 불편없이 일할 수 있을 만큼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가 성숙해진걸까.

안준호 셰프는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베이커리 주방 야간조 책임자로 일한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요즘은 주로 케이크를 만든다. [김경록 기자]

‘안준호입니다. (생일은) 1978년 11월 26일입니다.’

자기 소개를 부탁한다고 ‘말’하자 안 셰프는 종이 위에 이렇게 적었다. 청각장애 5등급(2~6등급) 가운데 가장 중증인 2급이라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처음 보면 대부분 장애를 알아채지 못한다. 상대 입모양을 읽어 소통을 하기 때문이다.

안 셰프는 경찰 아버지(64·안명선)와 전업주부 어머니(64·정영순) 사이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1978년 태어났다. 가족 중 장애가 있는 건 안 셰프뿐이라 부모는 그에게 구화(口話), 즉 상대의 입술 움직임으로 말을 이해하고 음성언어로 발어하는 걸 청각 장애를 발견한 다음 해인 네 살부터 가르쳤다. 그러니까 그의 청각에 문제가 있다는 걸 부모가 알아차린 건 세 살 무렵이다.

안 셰프 어머니는 이때까지 그저 둘째 아들 말이 늦다고만 생각했다. 당시 전라북도 임실에 살았는데 시골이라 그런지 다들 말 못하는 아이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가 퇴근 후 “혹시 얘가 못듣는 게 아니냐”고 했다. 바로 등 뒤에서 손뼉을 쳤는데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3형제(왼쪽 위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형·동생·안준호 셰프)와 어머니 정영순씨.

다음날로 전주의 대학병원뿐 아니라 서울 대학병원까지 숱하게 찾아다녔다. 청력장애가 맞았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태어났을 때는 여느 아이처럼 우렁차게 울었기에 아마 돌 무렵 홍역에 걸렸을 때 뭔가 문제가 생겼을 거라 추측할 뿐이다. 어머니는 서울 대학병원에서 최종 판정을 받고는 기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데 순간 뛰어내려 죽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고 나중에 털어놨다. 당시만 해도 장애는 본인은 물론 가족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천형(天刑) 같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안 셰프가 네 살 때 전주 선화학교(장애인특수학교)에 유학 보냈다. 수화부터 배우면 말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기에 구화 배울 곳을 찾았는데 가장 가까운 선화학교도 통학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렇게 안 셰프는 네 살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한편으로는 주위의 차가운 시선에서 잠시나마 떼놓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질시가 대단해, 대놓고 손가락질하며 벙어리라고 놀려댔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부 차원에서 장애인 복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80년대 이후다. 81년 장애인복지법 전신인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생겨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내에 장애인복지 전담부서(재활과)가 처음 만들어졌다. 하지만 실질적인 복지 수준이나 사회적 인식이 조금이나마 바뀐 건 88년이다. 88서울올림픽 직후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 개최가 계기가 됐다.

춤과 농구, 친구와 이어주다

중학교 시절부터 춤과 농구를 통해 친구를 사귀었다. 사진은 고2때 수련회에서 친구들과 무대에서 춤추는 모습. 왼쪽이 안준호 셰프.

부모는 86년 안 셰프를 성남 고모집으로 보냈다. 서울농학교(옛 선희학교)가 운영하는 유치원에 입학시키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수화와 한글을 배웠다. 그리고 이듬해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온 후 또래 보다 2년 늦게 서울농학교 초등학교를 보냈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들이 “애가 영리하니 일반 학교에 보내보라”고 권하는 거다. 부모 입장에서 욕심이 났다. 아들이 장애인 사회에 갇혀사는 대신 보통 사람과 섞여 살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학업을 좇아가기 어려웠어요. 수화로 하면 쉬운데 학교에선 수화를 할 수 없잖아요. 수업할 때 알아들을 수 없으니 공부를 아예 안 했어요. 자거나 만화책 보거나, 아무튼 수업 중에 딴 짓 많이 했습니다.”

 당연히 성적은 늘 바닥이었다. 하지만 부모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친구만 잘 사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에게 여러 번 상처받다 보니 점점 더 친구 사귀기가 어려웠다.

“못 듣고 말을 못하니까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게 어려워요. 친구 사귀기가 어려우니 당연히 친구가 별로 없었죠.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부탁해도 대부분 냉정하게 외면하더라고요. 친구라고 생각했던 애들이 나만 빼고 자기들끼리 얘기하기도 하고. 한마디로 왕따였던 거죠.”

농구하는 뒷모습. 2000년 광주에서 열린 장애인농구대회 출전 당시 모습.

중학교 어린 나이에 가출을 할 정도로 고민이 많았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자연스레 매사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아이가 됐다. 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듀스와 지누션을 보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뭔가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춤을 추고 싶었다. 그럼, 친구들이 나를 봐주겠지. 음악을 듣지 못하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음악 대신 진동에 맞춰 춤을 췄다. 카세트 볼륨을 최대한 키워 바닥에 내려놓으면 진동이 느껴지는데 여기 맞춰 춤을 췄다.

“춤추는 걸 즐겼어요. 귀는 안 들리지만 춤추는 순간은 자유로우니까. 게다가 춤을 추면서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게 됐고요.”

춤뿐 아니라 농구도 그에게 친구를 만들어줬다. 워낙 큰 키(현재 180㎝)에다 동급생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았으니 항상 덩치가 큰 축에 속했다.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미 프로농구(NBA) 스타 마이클 조던을 동경하며 농구를 시작했다. 비록 공부는 못했지만 제법 농구를 잘한 덕에 중학교 땐 주위에 친구가 꽤 생겼다. 그는 한국 장애인 국가대표로 발탁돼 2012년 아시아태평양농아인경기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빵, 사회와 이어주다

중학교 졸업 후 실업계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곧 농아특수학교인 서울농학교로 전학갔다. 시비거는 아이들과 자주 싸웠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센 탓에 아이들이 장애를 빌미로 괜한 시비를 걸어오면 바로 싸움으로 이어졌다. 결국 부모는 장애인학교인 서울농학교로 아들을 전학시킬 수밖에 없었다.

고3 시절 부모는 대학 진학을 권했다. 하지만 그는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우연히 TV에서 본 강남의 한 제과제빵학원에 등록했다. 그러나 첫 수업부터 막막했다. 아무리 구화를 한다지만 전문적인 제과제빵 용어를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결국 이론 수업은 빼먹고 실습만 했다. 눈치가 워낙 빨라서인지 실습은 이론과 달리 쉽고 재미있었다. 8개월 뒤 학원을 수료하고는 공덕동의 한 작은 제과점에 들어갔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안준호 셰프가 만든 아케리칸 치즈케이크(왼쪽)와 딸기케이크.

스물한 살, 그가 처음 맞닥뜨린 세상은 가혹했다. 장애인이라고 배려해주던 가족이나 학교와는 전혀 달랐다. 새벽부터 밤까지 매일 15~16시간씩 일했다. 그렇게 일해서 받은 월급은 50만원에 불과했다. 6개월 만에 옮긴 광화문의 제과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밤 늦게 끝나 집(사당동)에 갔다가 새벽에 다시 나오는 게 부담스러워 아예 가게 앞에서 노숙한 적도 적지 않다.

“당시 고졸 학력의 청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어요. 그나마 내겐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니 조건이 안 좋더라도 계속 한거죠.”

하지만 결코 쉽지는 않았다. 하루는 말이 안 통해 답답하다며 선배가 냉면 그릇으로 내리쳐 이마가 찢어지기도 했다. 우여곡절의 연속이었지만 빵 만드는 건 정말 좋았다. 그는 기존 레시피로 만족하지 않고 늘 어떻게 하면 더 맛있는 빵을 구울지 고민했다. 또 귀가 정상인 다른 사람은 하지 않아도 되는 노력 역시 필요했다. 예컨대 그는 빵을 오븐에 넣은 뒤 시간이 되면 나는 알람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는 대신 시간 감각을 몸으로 익히는 노력을 정말 열심히 했다. 집중력과 예민함을 키워 이제는 20분이면 20분을 딱 맞출 정도다. 안 셰프는 “빵을 만들 때 중요한 기술 못지않게 집중력도 필요하다”며 “안 들려서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빵 만드는 데만 집중할 수 있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호텔, 미래를 이어주다

아버지와 함께. 경찰이라 늘 바빴던 아버지는 5년 전 퇴임 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빵은 좋았지만 워낙 작은 빵집이라 미래에 대한 불안은 컸다. 2002년 우연히 한 친구가 그랜드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베이커리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얘기를 해줬다. 가슴이 뛰었지만 선뜻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1991년 장애인 의무고용제가 시행되면서 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체는 장애인을 1% 이상 의무 고용해야 하지만 대부분 아주 경미한 장애를 가진 사람만 뽑는다. 심지어 주위 동료가 그 사람이 장애인 몫으로 들어왔다는 걸 모를 정도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급호텔이 아무 것도 안 들리는 장애인을 뽑아줄까. 본인과 가족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밑지는 셈 치고 그냥 내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호텔에 가서 테스트로 빵을 만들었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런데 당시 과장이던 배한철 총주방장이 “맛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게 아닌가. 그렇게 1주일의 테스트 기간이 끝나는 날 배 총주방장은 “축하한다”고 했다. 인턴으로 채용된 거다. 배 상무는 “사실 준호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알았을때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칼이나 불, 가스 등 위험이 도사린 공간에서 청각장애인이 일하는 게 과연 적절한 일인지 처음엔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워낙 자신감 있어보이는 태도가 마음에 들어 채용했다.

 “호텔에 취직했을 때가 아마 부모님이 저를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 순간이었을 거예요. 아니, 다른 장애인 친구들도 정말 많이 부러워했어요.”

 장애인으로 산다는 건, 정말 힘들다. 취직은커녕 물건을 사는 등의 사소한 일상조차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편하다. 그도 관공서나 은행을 갈 때면 꼭 엄마와 같이 간다. 그런데 취업, 그것도 특급호텔이라니.

“말 못하는 장애인은 주로 공장에서 일해요. 제 친구들도 다 그래요. 타이어나 휴대폰 조립 공장에 많이 있어요. 한국에서 장애인은 영세한 공장 아니면 취업하기가 정말 어렵죠. 그래서 친구들이 저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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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 입사 후 그는 쉬지 않았다. 남들은 2년 걸리는 인턴을 1년 만에 마치고 정직원이 됐다. 호텔이 장애를 차별하는 대신 그의 실력을 인정한 것이다. 그는 지금 조식 뷔페와 델리에서 팔빵을 만드는 야간 주방에서 일한다. 세 명이 근무하는데 그가 최고참이라 책임자 역할을 한다. 호텔 생활 12년 동안 주로 야간 근무를 했다. 낮 근무를 하면 다른 부서에서 오는 전화를 받는 등 의사소통할 일이 많지만 야간 근무는 빵만 만들면 되기 때문에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그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빵을 만들기위해 아침 퇴근길엔 유명 빵집을 찾아 일부러 빵을 먹어본다. 또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바로 자신처럼 빵을 만들고 싶은 청각 장애인 후배에게 롤모델이 되겠다는 꿈 말이다. 얼마 전 성북농아인협회에서 주최한 멘토모임에 단팥빵 40개를 사들고 가서 청각장애 후배들을 만나기도 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희망이 보이더라고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제빵 전문가로 인정받고 승진하고, 존경도 받고 싶어요. 내가 잘돼야 나를 바라보는 청각장애인이 내 길을 따라올 수 있잖아요. 난 장애 때문에 힘들게 배웠지만 후배들은 보다 쉽게 배울 수 있게 돕고 싶어요. 농아인의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송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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