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은 시인이자 시조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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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정시인·민요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김소월 (본명 김정식)이 시조시인이기도 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김제현교수 (장안대교수·국문학) 는 「현대문학」2월호에 실리는 「김소월시조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소월은 13편 37수의 시조를 썼다』고 밝히고 소월의 시조작품을 소개, 분석했다.
김교수는 지금까지 시로 알려졌던 이들 작품이 사실은 시조였다는 것을 가려내고 김소월은 초기 시작활동을 시조로부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소월의 시가 7·5조의 한국적운율을 띠고 있는 것은 이같은 시조의 음률·민요의 음율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김교수가 찾아낸 소월의 시조는『은대촉』『봄밤』『제비』『깊이 믿던 심성』『생과 돈과 사』등. 이들 작품은 형식에 있어 완전한 시조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깊이 믿던 심성이 황량한 내 가슴속에/오가는 두서너 구우를 보면서 하는 말이/인제는 당신네들도 다쓸데 없구려!』
소월이 1921년 6월에 동아일보에 발표한 『깊이 믿던 심성』이란 제목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중장에 한 두자 파격이 있으나 음률상으로는 시조의 음률을 그대로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완벽한 시조의 형태이다. 그의 『제비』『은대촉』등은 파격도 없는 시조작품.
『동방에 달이 지고 인주렴 효성토록/님의 청삼 일야중에 스을고난 몸이어다/오히려 은대쌍병은 손미하게 붓나니.』
김교수는 이같은 시조작품이 있는데도 대부분의 국문학연구자들이 소월을 자유시인으로 생각하고 그의 작품을 시조로 분석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시조작품을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이 논문에서 금소월이 시조의 형식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시조를 쓰겠다는 의식을 갖고 이같은 시조작품을 썼음을 밝히고 있다.
김교수는 소월이 시조를 쓰겠다는 의식을 가진 것을 그의 작품『생과 돈과 사』의 분석에서 분명히 했다.
『생과 돈과 사』는 1934년 발표된 작품으로 시조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소월의 시작노트에는 이 작품이 자유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 김교수는 소월이 처음 자유시로 발표하기 위해 작품을 썼다가 완전히 시조로 개작하였음이 이 작품에서 드러나며 따라서 소월이 시조를 분명히 이해하고 쓰려고 하였음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소월의 시조작품이 찾아짐으로써 얻어지는 국문학상의 의의는 크다. 우선 소월시의 중심운율(7·5조)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알수 있게 되었다.
또 소월문학의 지금까지 알고있지 못하던 한 영역이 찾아져 이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소월의 시는 생내적 고독과 우수·허무주의와 체념의 미학등 애상적 정조와 임과의 만남이 없는 동경과 타한의 문학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시조작품의 발견으로 소월의 시세계는 임과의 만남과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음을 알수 있게 되었다.
김교수는 또 『의와 정의심』등의 작품에서는 소월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세계가 아니라긍정적이고 이지적이며 현실에 투철한 점도 발견된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소월의 작품이 20년대에는 서민정신에 뿌리를 둔 전통적 정서의 탐미적인 경향을 보였고 30년대의 작품에는 현실의식과 이지적사고를 가진 작품세계를 보인다고 보았다.
소월의 시조가 발견됨으로써 소월은 시조사적인 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김교수는 소월을 가람 이병기씨 보다도 먼저 현대시조에 있어서 사설시조를 시도한 사람임을 이들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시조시인으로서의 소월이 국문학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되어야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소월 이외의 우리시인의 작품에서 자유시로 처리되어 있는 많은 시조들도 밝혀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고 밝혔다.
김교수는 또 소월시가 가장 한국적인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그의 시의 근본이 시조·민요에 있었다는 것으로 한국시의 정당한 발전을 위해 하나의 모델로서 연구·검토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임재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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