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피해 민족혼 심어준 국어선생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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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나는 일제시대에 대구사법을 다녔다. 이 학교는 관립사범이기 때문에 일본인교사들이 판을 치고 있어 사사로운 사재접촉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5년간의 기숙사 생활은 완전히 군대식이어서 끊임없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한글신문이나 문학전집따위를 읽다가 들키면 틀림없이 정학처분을 받는 단속 속에서 기를 펴지못하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그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도 국어를 가르치던 김영진선생님은 틈틈이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워준 잊지 못할 스승이었다.
그분은 우리의 역사를 들려주었을 뿐 아니라 시조1백수를 몰래 프린트해서 가르쳐주곤 했다.
더구나 중무공같은 훌륭한 선조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그야말로 열변을 토해 우리들은 긴장과 흥분의 도가니 속에 빠져 들었다.
김선생님의 영향으로 민족혼과 애국심이 싹텄다고하면 좀 과장인지 모르나 나라잃은 국민으로서의 설움이나 자각같은 것을 배웠음은 사실이다.
이런일들로 인해 김선생님은 제자 몇사람과 함께 일경에 검거되어 해방될때까지 옥살이를 치르기도 했다. 성품이 워낙 솔직하고 소탈해서 입바른말을 잘하다보니 아슬아슬한 고비도 여러번 넘겼고 그래서 일화도 많다.
4·19전후해서 어느 고교 교장으로 재직하실 때 상의하러온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한마디만 남겨 그 학교가 4·19의 선봉이 된 적도 있어 유명하다. 6·25직후에는 당시 교장으로 계시던 모교에 봉직할 기회를 주어서 가까이서 모신적도 있다.
당시 전후의 어려울 때 제자들을 보살펴주던 온정은 부모의 그것을 넘어서는 정도여서 지금도 동문들이 모이면 그때의 얘기로 꽃을 피우기도 한다.
우리의 어린넋을 일깨워주던 김선생님은 지금은 8순이 넘어 병까지 얻어 거동마저 부자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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