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3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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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뭘 보슈, 빨리 갑시다.

동혁이 멈춰선 대위를 잡아당겼다. 돌계단 위에 퍼질러 앉아 먹은 것들을 온통 토해 내는 자도 있었다. 선술집, 시계포, 다방, 그리고 무선사에서는 스피커를 통해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흙탕물을 피하지 않고 철벅철벅 밟으며 걸어갔다. 그들은 묘한 감회 때문에 서로 내색을 않으려 하고 있었으나, 이런 마을이 자기들을 황량한 공사판의 흙벽 속으로 밀어 처넣었던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이 마을의 찬란한 진열장 속을 넘겨다보았을 때, 거기 비쳐 왔던 것은 손에 넣을 수 없는 상품들 위로 비치던 자신들의 젖은 꼬락서니였다. 그 희미한 윤곽은 잠옷 위로, 색깔들 위로, 가구나 찻잔들 위로 망령처럼 떠올랐다. 그들은 얇은 유리창 위에 흐르고 있는 낯익은 여염 동네의 생활을 훔쳐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해 추석 며칠 전에 우리는 간척 공사장을 떠났다. 빚 갚고 몇 푼의 노잣돈도 손에 쥐었다. 대위는 우물쭈물하더니 천안 집에 들렀다가 다시 일거리를 찾아 나오자고 말했다. 나는 그가 유치장에서 호기 있게 얘기할 적엔 전국 각지를 그야말로 무른 메주 밟듯하면서 돌아다니는 줄 알았더니,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길에 나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전주에서 대전까지 일단 동행하기로 하고 야간 열차를 탔다. 이른 아침에 대전 역에서 내려 부근 설렁탕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대위가 내게 물었다.

- 어떻게… 우리 집에 들러서 명절이라두 쇨래?

- 글쎄요… 그럴 바엔 나두 집으루 돌아갈까.

우리는 말없이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얘기로 듣기와는 달리 도처에 고되고 재미없는 삶뿐이었다. 나는 식당에서 나오며 그와 나란히 역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 대위 형, 여기서 찢어집시다.

- 어디루 갈라구?

- 뭐 남쪽으루 가 볼까 하구요.

그는 잠시 섰더니 내 발치에 와서 늘 들고 다니던 군용 하배낭을 내려놓고 걸터앉았다. 그가 사슴을 한 대 뽑아서 내밀었고 우리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역전 광장에서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나누어 피웠다. 대위가 담배 꽁초를 발로 비벼 끄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 잘 가, 그동안 재밌었어.

- 잘 사시우.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족들을 향하여 걸어갔다. 그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번 뒤를 돌아보더니 아직도 거기 서 있던 나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를 평생 다시 만나지 못했다. 어디선가 온 식구가 모여 오순도순 잘 살아가고 있겠지.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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