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을 겨레와 함께 울고웃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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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창경원이 처음 문을 연것은 1909년11월1일.
그뒤 일제와 6·25, l·4후퇴등 수난을 겪으면서 민족과 애환을 함께 해왔다. 창경원은 구한말 이 나라를 넘보던 일본인들이 순종을 위로한다는 구실로 동식물원을 건립하면서 탄생했으나 일본인들의 속셈은 『내정에는 간섭하지 말고 동식물이나 구경하면서 지내라』는 간교한 것이었다.
창경원이란 이름도 창경궁에서 따온 것으로 「궁」대신 「원」을 붙임으로써 궁이 갖는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동물원이 들어섰던 자리는 지금의 기상관측소 자리.
1907년 착공해 2년후인 1909년 11윌1일 완공돼 『백성들에게 실물교육을 시키고 그들의 위안장소로 쓰도록 하라』는 순종의 뜻에 따라 일반에게 공개됐다.
창경원은 그후 l945년 이른봄 2차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질 무렵 공습으로 맹수들이 탈출해 장안이 공포속에 잠길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일본인들이 동물가족들을 마구 사살하면서 1차수난을 겪었다.
그뒤에도 동물원은 50년 6·25동란과 51년 1·4 후퇴때 맹수들의 탈출로 인한 장안의 피해에 대비해 이곳 동몰들을 모두 사살, 2·3차 수난의 역사를 치른뒤 9·28 수복후인 54년 창경원 동식물원을 복원하고자 발족된 창경원동식물원 재건위원희가 각계로부터 동식물을 기증받아 오늘의 대식구로 키워냈다.
각종 에피소드 또한 숱하게 많다.
56년11월13일에는 당시 사육사 윤봉우씨가 평소 개와 사람사이처럼 원하게 지내던 반달곰의 기습을 받아 죽음직전에 이르렀다가 달려온 군인들이 총을쏘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60년에는 여수의 거인 이순근씨(당시 26세)가 끼니를 잇지못해 당시 장면씨의 도움으로 창경원 홍화문앞을 지키며 생활을 하다 2년후 이곳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또 65년7월25일에는 파월장병들이 기증해온 길이2.7m짜리 월남산 비단구렁이가 탈출, 지금껏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으나 창경원측은 월동을 하지못해 이미 죽은 것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76년 11월11일에는 관람객인 서서중씨(36)가 지난해 12월7일 노환으로 숨진 호랑이우리에 팔을 넣었다가 물려 오른쪽팔이 잘려 나가는 사고도 있었다.<임수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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