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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짜요" 엄마 한마디에 식단 바꾼 원장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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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8일 경기도 수원시 우만동 월드어린이집에서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부모들에게 완전 개방된 이 어린이집은 보건복지부가 최근 선정한 전국 최우수 어린이집이다. [사진 수원시]

18일 오전 11시50분 경기도 수원시 우만동 월드메르디앙아파트 1층에 위치한 ‘월드어린이집’. 이흥재(38)·김은정(39·여)씨 부부와 황정아(37·여)씨가 아이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어린이집을 찾았다. 이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와 아이와 함께 식사를 한다고 했다. 가끔은 몰래 들어와 아이들 수업을 지켜보기도 한다. 보건복지부 부모 모니터링단이 전국 국공립·사립·가정 어린이집 4만7000여 곳 중 만족도 1위의 최우수 어린이집으로 뽑은 어린이집의 평소 모습이다.

 아이 부모들이 이렇게 언제든지 수시로 어린이집을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임정선(43·여) 원장의 독특한 운영 방식 때문이다. 임 원장은 지난 6월부터 부모들에게 어린이집을 완전 개방했다. 부모들에게 체크 리스트를 주며 “이상한 점은 없는지 꼼꼼히 챙겨주고 잘못된 부분은 지적도 해달라”고 부탁했다. 체크 리스트에는 어린이 장난감의 나사못은 잘 고정돼 있는지, 전기 플러그 구멍은 덮개로 잘 막혀 있는지를 비롯해 모서리가 각이 져서 위험한 곳은 없는지, 냉장고 위생 상태는 괜찮은지, 에어컨에 먼지는 없는지 등 48개 항목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처음엔 의례적인 부탁이려니 싶었던 부모들도 원장의 거듭된 요청에 하나둘 어린이집을 찾기 시작했다. 한 엄마는 “원장님, 제가 영양사인데 아이들이 먹기에는 음식이 조금 짜네요. 나트륨 비중을 조금 낮춰주세요”라고 건의했다. 그러자 어린이집은 곧바로 모든 식단의 나트륨 염도를 낮췄다. 또 다른 엄마는 에어컨에 먼지가 없는지 손으로 닦아보기도 했다. 부모들은 냉장고의 식재료 유통기한부터 도마와 그릇, 아이들 칫솔 등 위생 상태도 꼼꼼히 점검했다.

 황정아씨는 “이곳저곳 챙기는 엄마들 모습이 마치 무슨 점검이라도 하러 나온 공무원 같았다”며 “나 또한 우리 아이들이 뛰노는 곳이라 생각하니 그냥 건성으로 넘길 수 없더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꼬치꼬치 지적하면 혹여나 나중에 아이가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며 “하지만 부모들의 지적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면서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월드어린이집은 매달 부모를 초청해 자녀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마련했다. 아이들과 함께 놀기, 아이들 식단과 똑같은 밥 먹기 등이다. 또 아이들이 수업을 어떻게 받는지 언제든지 와서 볼 수 있도록 ‘블라인드 시간’도 마련했다. 김은정씨는 “솔직히 우리 엄마들이 원장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잖느냐”며 “하지만 이곳에서는 엄마 아빠가 오히려 주인인 것 같다”고 만족해했다. 김씨는 최근 둘째 쌍둥이도 어린이집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았다.

 임 원장이 부모들에게 모든 것을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은 지난 5월 말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부모 모니터링단’의 점검을 받으면서다. 당시 모니터링단은 안전·위생·건강·운영 분야 등을 꼼꼼히 점검한 뒤 크레파스와 화분의 나뭇잎이 모두 3.5㎝보다 작아 아이가 먹을 수 있고, 바구니가 약해 아이가 물면 끊어질 수 있다는 등의 지적사항을 내놓았다.

 임 원장은 “그때 그 지적이 큰 전환점이 됐다”고 했다. “별로 문제될 게 없을 거라고 내심 자신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안에서 보면 안 보이는 게 제3자가 객관적으로 보면 얼마든지 보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는 “주부가 자기 살림살이를 다른 사람에게 보이길 꺼려하는 것처럼 어린이집을 공개하려는 결정도 쉽지만은 않았다”며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공개하는 게 맞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부모와 어린이집의 이 같은 노력이 모아진 결과 월드어린이집은 전국 최우수 어린이집에 뽑혀 지난 9일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았다.

임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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