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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엔 일단 호재 … 이번 유가 하락으로 소비 여력 2조원 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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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

 에너지 절약 광고에 등장하던 예전 표어처럼 한국은 세계 5위 원유 수입국이다. 매년 100조원가량을 석유 수입에 쓴다. 국내총생산(GDP)의 7.6%에 달하는 금액이다. 주요 20개국(G20) 중 인도(7.9%)에 이어 2위다.

 원유 가격이 떨어지는 건 한국 같은 수입국엔 호재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유가가 10% 떨어지면 GDP가 0.27% 늘어난다고 추정했다.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놓은 추정치도 0.2% 내외다. 원유 값이 낮아지면 우선 기업 입장에서는 제품 생산비가 줄어든다. 물건을 만들어 예전과 같은 가격에 팔아도 이윤이 더 늘어나는 셈이다. 소비자는 같은 돈을 가지고도 살 수 있는 물건이 늘어난다. 자동차 연료비·난방비에 들어가는 돈이 줄어 소비 여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통계청 등에 따르면 한 가구가 운송용 원료비로 쓰는 돈은 연 156만원 내외다.

 국내 정유업계는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휘발유 공급가격을 L당 40원 넘게 인하했다. SK에너지는 L당 1577원으로 전주 대비 48원, GS칼텍스는 1574원으로 46원 내렸다. L당 1400원대 주유소도 등장했다. 우리투자증권은 “이번 유가 약세로 가계 입장에선 약 2조1000억원 정도의 소비 여력이 추가로 생길 것”이라고 추정했다. 기획재정부가 그린북(최근 경제동향)에서 “유가 하락은 기업의 생산비 절감과 가계의 실질구매력 증대 등을 통해 전반적으로 우리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초래한다”고 전망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런데 장밋빛 전망과 달리 현실은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지난 며칠간 국내 금융시장은 충격에 휩싸였다. 유가 급락이 미국과 유럽 증시 약세로 이어지고, 그 충격파가 다시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다음날 코스피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주 1980대에 머물던 코스피는 16일 1904포인트까지 밀렸다. 외국인들은 최근 닷새간 1조9000억원어치의 주식을 던졌다.

 전망과 현실이 다르게 움직이는 이유는 우선 시차 때문이다. 유가가 반년 만에 100달러대에서 50달러대로 떨어졌지만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이투자증권 박상현 연구원은 “생산과 소비에서 유가 하락 효과가 나타나려면 6개월 정도 걸린다”고 말했다. 당장 투자자들에겐 주요 산업인 조선과 정유 업종이 입을 타격이 더 커 보인다. 유가가 떨어지면 해상 플랜트 수주가 줄고, 석유를 정제해 파는 정유사도 이윤이 감소한다. 국내 정유 4사는 올해 사상 최악의 실적이 예상된다. 3분기까지 누적 적자가 이미 9700억원 수준이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유가 하락으로 지난해부터 전 세계 정유업체들이 취소한 사업계획이 215조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더 심각한 시나리오는 유가 하락이 글로벌 경기 침체로 번질 경우다. 신한금융투자 윤창용 연구원은 “한국은 중동과 남미·러시아에 대한 수출의존도(약 14%)가 중국·대만보다 높은 편이어서 산유국 경기가 나빠질 경우 저유가 효과가 줄어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 말 저유가는 남미 외채 위기를 부른 주요 원인이었다.

김현예·이한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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