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이란사태 델터특공작전(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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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동문제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매일같이 나를 가장 압박하는 일은 어떻게 인질들을 안전하게 구출하고, 점증하는 페르시아만 지역의 긴장감을 감소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2명의 특사, 「부르게」와 「비알론」을 통해 「바니-사드르」대통령과 접촉을 하며 곤경에서 벗어 나오기 위한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미국이 이미 구체적으로 밝힌 기본원칙에 입각해서 미국·이란·유엔위원회가 각각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을 면밀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검토했다.
우리가 마련했던 원래의 인질석방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①이란 혁명위원회의 공식요청에 따라 5명의 유엔위원회를 구성한다. 위원들의 인선내용은 나와 「바니-사드르」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②유엔위원회는 사실 조사만 하는 기관이며 어떤 형태의 심판을 하지 않는다. 위원들은 비공개회의에서 양측의 주장을 경청한 다음 증거수집을 위해 이란을 방문한다.
③위원들은 인질을 방문하되 인질을 심문하지 않고 인질의 건강상태만 확인한다.
④인질들을 과격파의 수중에서 이란정부의 보호아래 두기 위해 이들을 전원 병원으로 이송한다.
⑤유엔위원회는 「발트하임」유엔사무총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며 이와 동시에 인질들의 이란출국이 허용된다.
⑥추후에 발생할 미-이란간의 분쟁은 양국정부가 구성할 공동위원회에서 처리한다.

<「호」옹 행동이 변수>
이 같은 계획이 마련된 것은 대단한 진전이었다. 왜냐하면 「샤」를 송환하라는 이란측의 당초요구가 삭제됐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접촉하고 있는 「바니-사드르」대통령과 「고트브자데」외상이 똑같이 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원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두 친구 「비알론」과 「부르게」가 테헤란에서 우리의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몇 가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바니-사드르」의 위치가 단단하지 못한데다 「바니-사드르」와 「고트브자데」사이의 불화가 깊어 서로 말도 잘 않고 있다는 점과 종교지도자들의 강력한 반발, 그리고 은둔중인 「호메이니」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모두 그런 어려움이었다.
유엔대표들은 제네바에서 모여 2월23일 테헤란에 도착했다. 대표들은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이란 관리들도 유엔대표들의 임무를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일이 계획대로 해결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유엔대표단이 이란에 도착했을 땐 이란 안에서 불길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호메이니」는 인질석방문제에 관해선 이란의회가 최종결정을 내려야한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이란의 새 정부가 4월 중순까지는 선출될 가망이 없었기 때문에 「호메이니」의 이 발표는 인질석방절차가 상당기간 연기되는 것을 의미했다.
더구나 과격파들은 유엔대표단이 인질을 방문해도 좋다는 「바니-사드르」와 혁명위원회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과격파들은 오로지 「호메이니」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호메이니」는 쿰시에 머물고 있으면서 어떠한 책임도 지려하지 않고 있었다.

<격려메시지도 보내>
「호메이니」는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개인적으로 혁명지도자들을 격려해 놓고서는 만일 어떤 결정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경우엔 혁명지도자들을 배반하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규탄하곤 했다. 이번에는 「바니-사드르」대통령과 혁명위원회지도자들이 만약 「호메이니」가 그들이 납치자들에게 내린 명령을 지지해 주지 않을 경우 사임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러한 압력으로 「호메이니」의 아들 「아마드·호메이니」는 드디어 유엔대표단의 인질방문을 허락한다고 발표했다. 「고트브자데」외상은 「호메이니」가 인질을 정부보호아래 옮기기를 바라고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고트브자데」이란 외상은 미국밀사를 통해 자신이 새로운 사태발전으로 몹시 들떠있다고 알려왔다. 인질이 오늘밤 중으로 혁명위원회로 넘겨지고 유엔대표단이 이번 주말에 인질을 면담하도록 일정이 짜져 있었다. 인질들은 그후 병원에 옮겨져 의사들의 진단을 받은 다음 석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되었다. <일기1980년3월6일>
-「조던」이 하오 늦게 전화를 걸어 인질들이 내일 아침 8시30분(미국시간)에 이란혁명위원회로 이송될 것이라고 보고해왔다. <일기 1980년 3월7일>
유엔대표단의 권유에 따라 나는 인질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녹음했다. 나는 이 녹음 메시지에서 미국시민들이 인질문제로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는가를 알려주고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그들을 격려했다.
날이 새자마자 나의 모든 희망이 부서지고 말았다. 「호메이니」가 인질의 혁명위원회 이송을 반대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바니-사드르」와 「고트브자데」는 혁명위원회를 다시 소집할 수도 없었다.
-「호메이니」는 유엔대표단이 미국과 「샤」의 불법적 행동을 규탄하기 전에는 인질을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혁명위원회에 지시했다. 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유엔대표단이 철수해야할 처지에 놓였다.
이란 땅에는 광신자들만 있을 뿐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유엔대표단이 이란에서 철수하는 즉시 외교관계 단절과 경제적 제재조치를 고려해야겠다.
이란재산을 단순히 압수하는 데만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몰수해 버릴 수도 있는지 검토를 시켜야겠다.
「바니-사드르」와 「고트브자데」만은 정말로 인질석방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다.「밴스」가 점심때 전화를 걸어왔다.
「바니-삭드르」가 유엔대표단에게 다음날 저녁까지 이란에 묵도록 요청했다는 얘기였다. 그 사이에 유엔대표단이 혁명위원회의 관계자를 만나 미국과 「샤」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어 혁명위원회가 이들의 인질방문을 허용한다는 발표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마지막 기회 놓친 듯>
나는 「밴스」에게 『절대로 그럴 순 없소!』라고 말했다. 그런 일은 나로선 도저히 수락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란정부 관리들을 믿고 일할 재간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 권한도 없이 말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기 1980년 3월10일>
우리는 이란 관리들의 완전한 이해와 지지를 바탕으로 상세한 계획을 수립했고 이에 따라 유엔대표단이 이란에 파견됐던 것이다.
선거를 거쳐 선출된 이란 관리들은 인질을 석방시켜 사태를 수습하려고 시도했으나 종교적 광신자인 「호메이니」는 정부결정을 뒤엎고 위기해결을 위한 합의를 계속 깨버리곤 했다.
우리의 최선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실망이 컸다. 이제 미국인질을 협상을 통해 석방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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