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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이란 사태 인질 444일(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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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정부의 각 기관간에 최대한의 협조를 유지하면서 이란에 대한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자니 각 부서로부터 제기되는 질문과 아이디어들이 서로 상충되었다.
이런 어려움을 조정하기 위해 최소한 하루에 한번 이상은 고위보좌관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재무장관 법무장관 안보담당보좌관 합참의장 대변인 법률고문 CIA국장 기타 필요한 요원들이 백악관 상황실에서 그런 모임을 가졌다.
혹 내 자신이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을 때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상세한 결과보고서가 나에게 즉각 제출됐다.
회의에서 또는 작성된 보고서에서 지적되는 정책적인 질문은 모두 나에게 집중됐다.
나는 이러한 질문에 답변을 해주고 추가지시를 내리면서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어떤 위기에 봉착하거나 특별히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만 할 때는 우리는 오벌오피스(대통령 집무실)나 각료회의실에 모였고 내 자신이 직접 모든 토론에 참여했다. 수개월간의 오랜 시련기를 거치면서 각자 서로 다른 부서에서 일하면서도 놀랄 만한 협조체제와 비밀을 지켜 회의내용이 외부에 새어나가 우리가 타격을 입은 적은 없었다.
이란위기가 발생했던 초기의 몇 주일동안 나는 사태를 면밀히 관찰하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광범위한 조치들을 검토했다. 그리하여 인질을 석방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오는 즉시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우리가 검토했던 조치 중에는 인질의 신변에 어떤 해를 입힌다면 미국은 군사적 행동을 취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비밀은 철저히 지켜>
나에겐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으나 나는 불필요한 여행은 모두 취소하고 워싱턴에 남아 있기로 결심했다.
11월8일, 나는 캐나다 공식방문을 연기했고 며칠 후엔 펜실베이니아·플로리다 여행계획을 취소했다. 고향인 조지아 주에서 갖기로 했던 휴가도 가지 않기로 했다.
워싱턴 가까이 서 머물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기본정책이 됐다.
불필요한 여행을 취소한다는 방침이 정해진 이상, 이번에는 이 방침을 변경할 경우 내가 인질사건에 흥미를 안보이거나 아니면 인질이 살아 돌아올 희망을 포기했다는 인상을 주게 됐다.
내가 워싱턴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것은 워싱턴 정가에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바로 이때부터 8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캠페인이 시작된 때문이었다.
인질사건이 터진 바로 그 주일에「에드워드·케네디」상원의원과「제리·브라운」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대통령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나는 12월4일로 예정해 놓은 내자신의 출마선언 계획에 설사 차질이 오는 일이 있더라도 인질이 모두 석방되기 전까지는 어떤 정치적인 모임에도 나타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는 오랫동안 재선되기를 희망해 왔다. 1년 전인 78년 11월,「먼데일」부통령과 나는 80년 선거에 다시 한번 등 일 티킷으로 재출마 하기로 이미 합의했었다.

<여론은 극도로 불리>
79년 3월「케네디」상원의원이 백악관으로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그에게 이 같은 나의 재출마 결정 내용을 알려 주었었다.「케네디」는 이 자리에서 나를 지지하겠다고 거듭 확인했다. 그 당시 나는「케네디」의 진짜 의중이 무엇인가를 알 도리가 없었으나 그해 봄부터 「케네디」가 계속 대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보고 나는「케네디」도 출마준비를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먼데일」「조던」「파월」그리고 아내「로절린」과 만나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논의했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참모 진들을 잘 추스르고 우리가 지금 곤경에 처해 있으며 앞으로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을 모두에게 알려주라고 일렀다. 나는 이들에게 우리가 국가를 위해 훌륭히 일하고 있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새 의회도 우리가 지배할 것이며 80년 대통령선거에 누가 도전을 해 오더라도 나는 기필코 승리를 거둘 것을 확신하고 있고, 마지막 한 표를 얻을 때까지 싸울 것이라는 점 등을 강조했다. <일기 1979년 6월12일>
여론은 나에게 몹시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론조사 결과 워싱턴 주변에서는 만일 「케네디」가 출마하기로 결심만 한다면 나는 후보지명의 기회도 놓치게 될 것이며 어쩌면 아예 출마자체를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6월의 어느 날 저녁, 나는 하원의원들을 초청해 이들에게 파나마 운하조약에 관한 입법문제를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몇몇 의원들은 개인적으로 나에게 감히「케네디」의원과 예비선거에서 맞붙을 작정이냐고 물었다.
나는 물론 그럴 생각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하고선 참담한 여론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몇 마디 촌평을 덧붙였다. 다음날 아침 놀랍게도 내가 했던 퉁명스러운 표현이 뉴스거리로 보도되었다.
-「먼데일」과 점심을 같이 했다. 그는 내가『「케네디」의 궁둥이를 채찍으로 휘갈겨 주겠다』고 한 표현은 무분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쓸쓸해 보였다. 그러나 나의 몇몇 참모들은 그러한 내 발언이 백악관주변의 사기진작을 위해선 아주 훌륭했노라고 말했다. <일기 1979년 6월20일>
미국 인질이 억류된 이후 나는 민주당 예비선거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란사태와 다른 업무에 주로 골몰했고 선거캠페인은「먼데일」과「로절린」, 그리고 다른 보좌관들에게 맡겨졌다.
-오늘 아침 5시45분「밀러」재무장관이 전화를 걸어와 이란 측은 미국내의 이란 자금을 모두 빼내도록 명령했다고 전했다.

<재산동결 비난성도>
나는 즉각 이란 측이 미국에 지고 있는 모든 형태의 부채를 조사할 때까지 이란재산을 압류할 수 있는 긴급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이날 아침 나는 공화당 의회지도자들과의 조찬에 참석하기 직전에 미국내의 이란 재산동결 명령에 서명했다. <일기 1979년 11월14일>
미국의 이란원유수입 중단 결정에 대해선 전세계가 거의 한결같이 우리를 지지했었지만 미국이 이란 재산을 동결하기로 하자 이번에는 반대의 소리가 들려 왔다.
그라나 이란 지도자들의 이성을 되찾도록 하기 위해선 미국의 정치·경제적 압력이 불가피했다.
미국이 약 1백20억 달러에 이르는 이란 측 재산을 압류한 것은 이란 지도자들의 주의를 끄는데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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