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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프린스 ‘소설가의 방’의 추억…책이 된 호텔, 작가의 혼을 심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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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에 위치한 호텔 프린스의 별장. 독립된 빌라 형태로 세 채가 나란히 있는데, 그중 한 채가 ‘소설가의 방’이다. 7~9월에 이곳에 머물렀던 소설가 서진(사진)은 잔디밭에서 명상을 하며 시상을 떠올렸다.

여행하다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 우리를 떠나도록 부추기는 것이 단지 자연풍경만은 아니며, 누군가가 살았던 흔적이야말로 우리에게 유혹적인 이정표가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흔적이란 세계 몇대 박물관이라든지 몇백년 묵은 왕궁,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무엇이 아니더라도 충분하다.

언젠가 이스탄불을 여행하다 많은 사람들이 페라팰리스 호텔을 찾아가는 이유가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흔적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411호였던가, 그 방 한 칸은 아가사 크리스티가 머물며 여러 작품을 구상하고 쓴 곳으로 유명 해졌다. 그 도시의 시르케지역과 더불어 페라팰리스 호텔은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이 탄생한 고향으로 통한다. 이렇게 창작의 현장이 되어 의미가 증폭된 공간들이 꽤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런던의 킹스크로스역에 가서 ‘9와 4분의 3 승강장’ 찾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소설은 정말 그곳에 ‘9와 4분의 3 승강장’을 만들어냈고, 많은 사람이 그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조앤 롤링이 집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4개월 된 아이와 함께 찾아갔던 니콜슨 카페에 가기 위해 에든버러로 향한다. 그 도시에서 조앤 롤링이 한 번 이라도 앉아봤던 카페 몇 곳은 ‘해리포터의 탄생지’라는 문구를 내걸고 있다.

독자들에게는 소설가의 고향보다도, 소설이 탄생한 고향이 더 궁금할 수 있다. 소설은 허구의 것이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작품의 고향이란 소설가의 영혼 또는 육체 속 어디쯤일 테지만, 이야기가 착상된 공간, 집필된 공간은 또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작가들이 책을 출간했을 때 단골로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작업공간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장편소설의 경우에는 이 소설을 언제 어디에서 썼는지 그 과정과 배경 자체가 또 하나의 작은 부록처럼 읽힐 수 있다.

남 얘기처럼 쓰긴 했지만, 사실 나 역시 에든버러에서 조앤롤링이 글을 썼다던 카페가 어디인지 찾아 헤매고, 고흐나 쇼팽의 동선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발자크의 집에 들어가 그의 육필 원고들을 필체감정가처럼 훔쳐보길 즐겼다. 도데의 풍차에 오르겠다고 비바람을 뚫고 시골마을을 전진하기도 했고, 어느 도시에서든 헤밍웨이가 단골이었다던 카페가 있으면 들어가 그가 즐겨 마셨다던 음료를 주문했다. 헤밍웨이 이 양반 참 여기저기 다녔네, 중얼거리면서.

호텔 프린스의 또 다른 추억 ‘소설가의 방’

서울 프린스호텔의 ‘소설가의 방’은 젊은 작가들의 창작의 열정이 녹아 있다. 호텔은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며 작가들을 후원한다.

내 사진첩 속에는 여러 문짝 앞에서 인증샷처럼 찍은 사진들이 꽤 보이는데, 그것 역시 내가 좋아했던 예술가들이 머물렀던 문짝이었다. 프라하 황금소로 22번지 (카프카) 문지방을 몇 번이나 넘나들며 사진을 찍어대는 동안 내가 진짜 포착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단지 나는 그 공간을 아주 잠깐 이나마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공간에 머물렀던 카프카의 느낌을. 물론 그것은 소유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단지 소유하려는 행위만 증명 가능한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찍은 ‘문짝샷’이 꽤 많다. 몽마르뜨 같은 곳에 가면 몹시 바빠졌다. 한 집 건너 고흐, 위트릴로, 수잔, 피카소…. 찰칵찰칵하다가 마침내 에릭 사티의 집을 찾아내 그집 문짝에 달라붙어 또 한 장을 찍었다. 시간을 잘 맞춰가지 못해 내부를 보지 못했지만 사실 내부가 공개되든 아니든 볼 수 있든 없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마치 좋아하는 스타의 집 앞에 죽치고 앉아 있는 팬들처럼 나는 누군가의 흔적 옆에 잠깐 멈춰 있기를 즐기는 것뿐이다. 물론 지금 그들은 그곳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떤 번지수는 여정의 목적지가 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새삼 깨닫게 된다. 여행자의 지도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이들은 역시 예술가들이구나 하고. 그것은 그 당시든 지금이든 실제 소유주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또 다른 개념이다.

지난 시대 예술가들의 흔적을 따라 다니다 보면 그들이 왜 그렇게 이사를 자주 했는지도 새삼 알게 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걸 단지 방랑벽으로만 볼 수는 없다. 분야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예술가들에게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예술가들에게는 편안하면서도 신선한 공간이 늘 필요했다. 공간은 단순한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이 만난 다면체 이상의 그 무엇이다. 가끔 그 결핍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덕분에 나는 파리의 고서점 ‘셰익스피어&컴퍼니’와 같은 공간도 알게 되는 것이다. 1919년 센 강변에 처음 문을 연 이 서점은 공간이 절실한 작가들에게 침대와 밥, 그리고 친구를 만들어준 곳으로 유명한데. 그 서점에서 머물렀던 작가가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지금 그곳은 파리의 아주 유명한 관광명소 중의 하나로, 서점 이상의 무엇이 되었다. 공간 자체가 살아있는 이야기가 된 셈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예술가들은 이동한다.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작가마다 작업스타일이 달라서 오로지 집, 혹은 어떤 특정한 책상과 의자를 고집하는 작가도 있지만, 일부러 낯선 공간을 좇는 작가도 있다. 그래서 국내외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은 항상 인기다. 보통 일정기간 동안 개인집필공간, 그리고 세 끼 식사 혹은 취사시설을 제공한다. 머무는 동안 참여 가능한 문학프로그램을 갖춘 곳도 있다. 국내에도 몇 군데 작가 레지던시가 있는데, 서울 시내에 있는 곳은 연희문학창작촌이 대표적이다. 정기적으로 독자와 작가가 소통하는 시간을 갖고 있어 작가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국내작가는 물론이고, 해외작가도 이곳에 와서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까지 머무른다.

그리고 2014년 봄, 서울 한복판에 작가들을 위한 집필공간 하나가 더 생겨났는데, 명동에 위치한 서울프린스호텔. 관광객을 포함해서 무수히 많은 인파가 오가는 서울의 중심부, 공실률이 0에 가까운 호텔에서 누군가가 글을 쓰고 있다. 문 앞에 ‘소설가의 방’이란 표식을 내걸고.

내가 프린스호텔로부터 연락을 받은 건 지난 3월이었다. 나는 그 호텔을 잘 알고 있었다. 올해 초, 한 격주간지에 ‘호텔 프린스의 추억’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나를 포함해 네 명이 프린스호텔에 투숙했던 하룻밤을 다룬 칼럼이었다. 프린스호텔에서 그 칼럼을 보고 연락해왔을 때 나는 좀 당황했는데, 마치 내 소설 속의 주인공이 직접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 같은 그런 기분과 비슷했다. 물론 칼럼 속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는데 실은 그래서 더 쑥스러웠다.

나는 세 명의 선배와 함께 트윈룸에 머물렀다. 이미 정원초과를 저질렀고, 노트북을 충전한답시고 복도의 콘센트를 점거했으며, 맞은편 객실에서 나오던 다른 투숙객이 나를 보고 깜짝 놀랐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게 사과를 했다. 그 1박의 취지는 원래 신춘문예 준비용 합숙훈련 같은 거였는데, 신춘문예가 합숙한다고 되겠나. 우리는 새벽 한 시까지 노트북만 충전한 후 한 시 반부터 명동 거리를 거닐다가 다시 방에 들어와 피자나 우걱우걱 씹으며 귀신 얘기를 했다. 준비된 당선자들처럼 굴었던 우리는 그해 신춘문예에 모두 낙방했다.

도심 한복판의 소설 실험실

1. 19세기 유럽 작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파리의 고서점 ‘셰익스피어&컴퍼니’. 2. 고흐가 머물며 창작 활동을 했던 파리의 ‘고흐의 집’은 오늘날 관광객들의 단골코스가 됐다. 3.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에메는 몽마르뜨의 한 공원에 자신의 작품(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처럼 남았다.

10년도 훨씬 전의 그 하루가 매개가 되어 나는 다시 프린스호텔에 갔다. ‘그날의 추억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고 듣긴 했지만, 그날의 추억에 대해 무엇을 더 얘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프린스호텔의 볕 잘 드는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유쾌했고 따뜻했다. 남승우 이사, 조익환 총지배인, 이의구 총무관리팀장 등 모두 여섯 명의 사람과 이야기를 했는데, 마치 고교시절 문학서클 대표들이 만난 것 같았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다 나는 신선한 얘기를 들었다. 작가들의 작품 활동에 호텔 프린스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고 싶다는 거였다. 호텔 측에서 제안한 것은 서울과 제주 서귀포에 위치한 프린스호텔의 객실 한 곳과 별장 한 곳을 소설가들의 집필실로 제공하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최대한 빨리 시작할 수 있으며,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꾸준히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최대한 젊은 소설가들에게 이 기회가 돌아가길 바란다고 했는데, 그건 기회와 관심이 좀 더 필요한 시기일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거였다.

그래서 ‘소설가의 방’이 태어났다. 서울 명동에 위치한 호텔의 객실 한 곳, 그리고 제주 서귀포에 위치한 빌라 한 채를 젊은 소설가들의 집필실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호텔은 홈페이지를 통해 2∼3개월씩 이용할 소설가들의 지원을 받았고, 지원신청서와 작품창작계획서를 토대로 판단한 후 일곱명의 소설가를 2014년의 입주작가로 선정했다. 제주도는 김경희, 서진, 정지향 소설가가 각각 3개월씩, 서울은 김혜나· 황현진·이은선·안보윤 작가가 각각 2개월씩 사용하게 되었다. 선정기준은 가능성을 가진 젊은 작가일 것, 그리고 집필 계획이었다. 지원신청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원하는 작가가 많았고,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2014년의 작가가 모두 선정된 다음에도 호텔 측으로 문의가 빗발쳤다.

첫 번째 작가가 입주하기 전에 먼저 입주해야 될 물품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호텔의 남승우 이사는 미리 제주도에 다녀왔고, 프린터를 새로 주문해 서울 호텔의 객실 내에 놓았다. 모든 작가가 입주하기 전에는 서울프린스호텔 식구와 작가들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마련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A4용지와 토너가 떨어졌을 때 반드시 연락해야 할’ 직원도 소개되었고, ‘하루 세 끼 식단을 관리하니 원하는 메뉴가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야 할’ 직원도 소개되었다.

호텔에서는 내부의 세미나실 역시 문학강좌 공간으로 무상제공했는데, 사실 이 호텔의 문학 사랑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남상만 회장을 비롯해 많은 직원이 책을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책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이 호텔은 지난 9월. ‘대한민국 독서대전’에서 ‘2014 독서경영 우수 직장 인증제’로 상을 받기도 했다. 30명이 넘는 직원이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함께 읽고 모두 감상문을 쓰기 시작한 건 2008년 5월부터다. 독서감상문은 내부의 심사를 거쳐 매달 시상을 한다. 그리고 연말에는 왕중왕을 뽑는다.

5월, 소설가 김혜나(32)가 호텔 프린스 서울에 가장 먼저 입주했다. 그는 방에 들어가기 전부터 “TV를 방에서 빼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다. 호텔 측에서는 TV를 빼냈다. 나는 TV를 뺀 작가보다도 TV를 넣어달라고 요청한 작가가 있는지 그게 더 궁금했지만, 일단 호텔 방에는 TV가 기본 사항이라 김혜나가 나간 지 하루 만에 TV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소설가의 방에 새로 입주한 물품들은 프린터와 무선인터넷 중계기. 그리고 문 앞에 붙은 표식이다. 작가의 집필실 앞에는 ‘소설가의 방’이란 이름의 표식이 붙어 있다. 그리고 ‘이 객실은 소설가 OOO께서 집필하는 객실입니다. 조용히 이동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문장이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적혀 있다. 호텔 측에서 창 밖으로 공사 현장이 보이지 않고 다소 조용한 방향을 고려해서 배치한 객실이다. 이어서 소설가 황현진(35)과 이은선(31)이 머무는 동안에는 무선인터넷 중계기가 실수로 꺼져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호텔 측에서 그 후 아예 단독 무선인터넷 중계기를 객실 안에 설치했다.

호텔리어들의 책사랑이 빚어낸 공간

소설가인 동시에 요가 강사로도 일하는 김혜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평소처럼 요가로 하루를 열고, 주 2회 요가수업을 하러 나가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명동 한복판의 이 호텔에서 보냈다. 주된 작업 장소는 호텔 객실과 1층 카페테리아였지만, 그는 호텔의 많은 공간 중에서도 아침식사를 하는 2층의 레스토랑을 특히 좋아했다.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한 군데에 모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이 돌아다니고, 외국어가 들리는 풍경속에 있으면 문득 서울이라는 공간이 무척 다양해지고 낯설어지는 느낌이었어요. 창가 자리에 앉아 퇴계로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뭔가 비워졌다 채워지기를 반복했고요. 그래서 자꾸만 뭔가 쓰고 싶어졌죠.”

지금은 소설가 안보윤(34)이 그 객실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단절된 공간을 다룬 장편소설을 구상하던 중에 호텔 프린스의 모집소식을 듣게 되었다. 시공간을 비틀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간의 변화가 필요하던 시점이었다. 소설 안에서도 번화가와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있는 단절된 공간이 등장한다. 호텔 프린스는 그런 점에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탁 트인 공간에서 문 하나만 닫으면 방이 밀폐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온몸으로 체험하며 글을 쓸 수 있었다. 게다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인상적으로 본 직후이기도 했다.

그가 입주를 희망한 시기는 가을의 두 달이었다. 연락을 받은 것은 지난 봄. 작가는 여름 한 계절 동안 구상한 이야기를 다듬어가며 공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 기다렸던 공간에서 하루의 절반 이상, 글을 쓰고 있다.

김혜나와 안보윤, 황현진 등은 모두 연희문학창작촌이나 토지문학관, 21세기문학관 등에서 몇 달간 머무른 적이 있다. 낯선 공간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다. 안보윤은 지난 3월 소설집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를 출간했는데, 책 속 ‘작가의 말’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다. ‘여기 있는 소설들은 모두 타인의 책상에서 쓰였다’고.

“그런 점에서 보면 호텔은 특히 매력적인 공간이에요. 방은 나 자신에게 허용된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내 것이 하나도 없는 공간이기도 하죠. 거기서 오는 이질감이랄까, 누군가가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아무 기록도 남지 않은 책상을 보면서 내가 뭔가를 기록하는 것이 더 흥미롭게 느껴져요. 내가 채워 넣을 수 있는 공간처럼 다가오죠. 2개월이란 시간은 심리적으로 아주 여유롭다기보다는 바짝 일해야 될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에 꽤 적절하게 느껴졌어요.”

안보윤이 특히 좋아하는 공간은 호텔 로비다. 로비로 들어설 때, 이 공간이 순간적으로 돌연 낯설어지기 때문이다. 여행자가 된 듯한 느낌, 이곳에 머물러본 작가들이 모두 동의하는 그 느낌 말이다.

지난 9월 첫 소설집 '발치카 NO.9'을 출간한 소설가 이은선. 그는 지난 여름의 뜨거운 두 달을 이곳에서 보냈다. 커피 생두를 볶아 친한 이들에게 선물하고 함께 나눠 마시길 즐기는 이 작가는 호텔 프린스 식구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호텔에 들어가서 주구장창 작업만 하고 나오니 두 달이 훌쩍 지나가 있었어요. 우선 내 공간이 아닌 곳에서 오롯이 책과 소설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호텔이라는 공간의 의미가 제 생각 속에서 새롭게 자리 잡았고요. 남산의 정기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남산과 호텔 프린스는 제게 첫 소설집의 추억으로 남게 되겠지요.”

705호, 506호, 1104호… 책이 된 문들

두 달 동안 그는 단편 한 편을 새로 써서 계간지에 발표했고, 첫 소설집의 마지막 마무리작업을 하기도 했다. 등단 이후 꾸준히 발표해온 10편의 단편소설을 한 권의 책에 묶는 시점이었다. 책 속 ‘작가의 말’을 호텔에서 썼는데, ‘밤마다 홀로 빛나던 열 개의 무대를, 두 손을 묶던 열 번의 결계를 이제야 푼다’고 고백하는 글은 마지막에 ‘명동 프린스 소설가의 방에서’로 마무리된다.

김혜나 역시 지난 9월에 출간한 중편소설 '그랑주떼'에 호텔 프린스의 흔적을 담았다. 책날개에 들어갈 작가 프로필 사진을 그가 머무른 방에서 찍었던 것이다. 입주 작가들이 호텔을 작품에 노출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작가들은 알게 모르게 호텔에서 보낸 시간을 자신들의 책 속에 담고 싶어 했다. 그건 그 시간이 준 특별함을 박제하고 싶은 욕구 때문일 것이다.

서울의 호텔에서 몇 걸음만 이동하면 구불구불한 남산 산책로로 접어든다. 서울에 머물렀던 네 명의 작가는 공통적으로 남산 산책이 일상으로 들어오면서 많은 에너지를 줬다고 고백한다. 또 하나의 에너지원은 역시 사람이다. 두 달 동안 작가들은 호텔 식구들과 정이 든다. 언제든 원하는 커피를 만들어주던 호텔 1층의 카페테리아 직원부터 객실 정리를 깔끔하게 해주시던 메이드 아주머니까지, 작가들은 호텔에 머무는 동안 직원들의 친절함에 감동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직업적인 친절함의 수준이 아니라 정말 소설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친구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그래서 두달 단위로 머물렀던 작가가 떠나고 새로운 작가가 오는 시점이 되면 호텔 측에서는 또 환영과 환송의 자리를 마련한다. 맥주 한잔, 소주 한잔하며 정을 나누는 것이다. 김혜나 작가는 최근 '0대산문화' 가을호에 발표한 에세이를 통해 ‘소설가의 방’에서 보낸 두달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글을 쓰는 일만으로는 스스로의 생계조차 책임질 수 없는 현실에 극심한 자격지심과 자괴감에 시달리는 날들도 많았다. 허나 호텔 프린스 소설가의 방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매우 고맙고 뿌듯하기만 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에게 무한한 호의와 친절을 베푸는 이들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리하여 소설가의 방에 머무는 동안 나는 다른 그 무엇에도 신경을 쓰거나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글을 쓰는 지금 여기의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소설가의 방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그 소중한 순간들이 앞으로 보다 많은 작가에게 널리 퍼져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가는 호텔의 얼굴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기회, 호텔측에서는 작가의 맨 얼굴을 보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물론 그것은 화장을 걷어낸 맨 얼굴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로 확장될 수도 있다. 호텔 측에서 이런 시도를 한 것이 문화계에는 신선하고 즐거운 충격이었는데, 그것이 언론에 몇 차례 노출되면서 다른 기업에서 호텔 쪽으로 연락이 오기도 했다. 이 일의 취지에 공감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어떤 과정으로 진행하게 되었는지를 궁금해했던 것이다. 이의구 팀장은 호텔 내외부의 반응이 모두 좋았다고 말한다. 처음에 다른 호텔 관계자들이 매출에 큰 지장이 없는지를 물어왔지만, 이것은 단지 매출 이상의 무언가라고 그는 강조한다. ‘우리 회사가 이런 시도를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직원이 많다’는 것. 그는 지금처럼 여러 모로 과도기적 시대에,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승우 이사 역시 호텔은 단순히 잠만 자고 가는 공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업차 오든, 관광차 오든 목적을 이루고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공간’이 프린스호텔이 응시하는 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 공간에 머무시는 작가 분들이 단순히 잠자는 공간 이상으로 이 공간을 잘 활용하실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호텔 직원들은 움베르토 에코, 박민규, 최인호 등을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는다. 그들은 지금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책임질 작가들과 젊은 날을 공유하는 중이다. 소설만 탄생하는 게 아니라, 작가와 호텔리어 사이에 즐겁고 신기한 에피소드들도 마구 태어나고 있다.

호텔 프린스의 서울 공간에서 도시를 느낄 수 있다면 제주 공간에서는 자연을 느낄 수 있다. 소설가 서진(39)은 7월부터 3개월간 제주 서귀포에 위치한 ‘소설가의 방’에 머물렀다. 하와이, 로마, 뉴욕 등 다양한 지역에서 머물며 글을 쓰는 작가이기에 작업공간의 변화가 어떤 효험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으나, 작가의 대답은 의외로 덤덤했다. 사실 자신에게 작업 공간의 변화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에 가나 일정한 시간(오전 8~11시 전후)에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간에 무뎌서가 아니라 모든 공간의 개성을 존중하기에 나오는 대답이 아닐까.

“하와이에 간다고 시원한 글이 나오거나 로마에 간다고 역사적인 글이 나오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요. 글을 쓸 때 바라보는 풍경의 변화는 있습니다. 벽을 보고 쓸 때도 있고, 나무를 보고 쓸 때도, 맞은편 집을 보고 쓸 때도 있으니까요. 지금까지는, 제주에서 잔디밭을 보면서 쓸 때가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도 자연도 창작의 에너지원

그가 지금까지 머물렀던 곳 중에 가장 좋았다고 고백하는 곳이 제주도 서귀포에 위치한 ‘소설가의 방’이다. 암묵적으로 호텔 프린스의 서울 공간에는 작가 외 외부인의 출입이나 투숙이 금지되고 있지만, 이 공간은 제주의 외진 공간에 있다 보니 가족과 함께 입주할 수 있다. 제주 공간에서는 식사가 따로 제공되지 않는 대신 취사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모두 자연의 소재를 활용해서 지은 곳이라 대도시에 있던 사람도 이곳에 와서 자면 3일째 되는 날 두통이며 아토피가 사라진다는, 직원들 사이에서 꽤 사랑 받는 별장이다. 그 피톤치드 속에서 보낸 여름을 서진은 ‘작업에 방해가 될 정도로 좋았다’고 회상한다. 주로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근처를 돌아다니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공간이 서귀포 귤농장 한가운데에 있어서 사람들을 잘 볼 수 없었어요. 오후엔 숲길을 걷거나 바다에 갔습니다. 아내는 스노클링을 좋아하고 ‘정글의 법칙’ 팬이라서 문어도 잡고, 소라도 잡고, 물고기도 작살로 잡았습니다. 아마도, 평생 먹은 문어보다 더 많은 문어를 먹은 것 같네요. 소라도 마찬가지. 많은 게 기억이 납니다만 저는 한라산 남벽이 뚜렷하게 보이는 순간이 기억에 남습니다. 3개월 동안 아마도 네다섯 번 본 것 같습니다. 집 뒤뜰에서 한라산이 보이는데 보통은 구름이 끼어 있어요. 하지만 몇 번은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정상과 능선이 다 보입니다. 정상은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과 닮았어요. 의자에 앉아 한참이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풍경 속에서 그는 동남아시아 여행기를 마감해 '청춘 동남아'라는 책으로 묶었다. 그리고 김영갑 갤러리나 다랑쉬 오름을 오르면서 보통사람이 사진에 미치게 되는 이야기는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김영갑 사진작가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읽으면 초반 20페이지 정도만 읽어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요. 그가 끼니를 거르고 고생을 해가면서 제주의 오름 사진을 찍은 이유는 사람들은 이해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해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고, 그것을 예술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도 있을 테니까요. 점점 도시화, 산업화되는 세상 속에서 진정한 예술가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어쩌면 보통사람도 제주의 자연 속에 빠지면 예술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말입니다.”

‘소설가의 방’은 가장 뚜렷한 의도와 목적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장 막연한 공간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막연함이 창작자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무엇이다. 작가들은 저마다 작업방식도 활동시간도 취향도 달랐지만 모두 이 공간을 나름의 박자와 각도로 받아들여 소화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소설 안에 남는다. 그래서 상상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한국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소설가의 방’이 유혹적인 이정표가 되는 날을. 당장도 주목을 받을 만한 행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방은 더 많은 이야기를 담게 될 테니.

윤고은 소설가. 1980년생. 대산대학문학상, 한겨레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무중력증후군' '1인용 식탁' '밤의 여행자들' '알로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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