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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9회 아시안게임 카운트다운|한국의 역대전적(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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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5면

62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4회 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4개에 불과한 사상 최악의 성적(6위)을 남겼다. 그러나 경기력의 침체가 불러온 불명예는 아니었다. 대회자체에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회를 주최한 인도네시아는 정치적 이유로 이스라엘과 대만의 초청을 거부, 국제적 분쟁을 일으켰으며 육상과 역도의 국제경기연맹이 단호한 압력을 가해 한국등 다수의 국가가 이 종목으로부터 철수했다.
따라서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육상 남녀중장거리의 한명희 이상훈 김연범과 역도의 유인호 이형우 황호동 등이 출전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금메달리스트는 사격의 남상완(자유소총). 복싱의 정신조(플라이) 김득봉(라이트) 김덕팔(미들)이었다. 축구와 남녀 배구는 여전히 은메달이었으며 수영에서 처음으로 진장림(평영1백m) 조창제(하이다이빙)가 메달권(동)에 들어 값진 수확으로 평가되었다.
66년 제5회 방콕대회부터 한국의 메달작전은 한가지 특색을 나타낸다. 복싱에서의 「금 남획」 이다.
한국은 주최국 태국과 치열한 2위 쟁탈전을 벌었으며 사격에서 3개, 역도에서 2개, 그리고 사이클에서 1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그리고 구기종목에서 처음으로 탁구남자 개인단식의 김충남이 정상에 올라 기염을 토했고 이어 손영환(플라이) 김성은(페더) 박구일(월터) 이홍만(라이트미들) 김덕팔(라이트헤비)등 5명의 철권이 내리 금메달을 휩쓸었다.
이 막판의 「몰표」로 한국은 태국과 금메달 l2개 동수를 기록했으나 은메달수에서 4개가 더많아 극적으로 종합2위를 달성했다.
이러한 양상은 70년 제6회 방콕대회 이후에도 변함없이 계속된다. 이 두번째 방콕대회에서 한국은 복싱 11체급중 김충배(라이트플라이) 지룡수(플라이) 김성은(페더) 김현치(라이트) 정영근(휄터) 박형석(라이트미들)등 무려 6명이 금메달을 획득, 복싱왕국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 이 대회에서 또 「아시아물개」 조오련이 자유형 4백m와 1천5백m를 석권하고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가 투포환에서 우승했으며 축구와 농구(남자)가 처음으로 정상에 올라 한국엔 경사가 겹쳤다.
이 제6회 대회에서 스포츠르네상스를 향해 치닫는 듯한 기세를 보였던 한국은 74년 제7회 테헤란대회에 즈음하여 세찬 제동이 걸렸다. 중공과 북한의 등장, 그리고 중동세의 팽창때문이다.
금메달수에서 일본·이란·중공에 현격히 뒤져 종합4위로 밀려났고 북한엔 불과 금메달 1개차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역시 복싱이 수훈이었다. 박찬희(라이트플라이) 유종만(페더) 김태호(라이트) 김주석(웰터) 김성철(미들)이 그 주인공이다.
78년 제8회 방콕대회에서도 황철순(밴텀) 최충일(라이트) 김인창(라이트웰터) 황충재(웰터) 박일천(라이트미들) 등이 금메달5개의 평년작을 거둬들여 「북한제압, 종합3위」달성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이때 여자궁도 김진호, 축구, 남자배구, 여자농구의 우승과 여자테니스에서 금2개 획득이 특기할만한 발전이었다. <박군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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