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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직의 바둑 산책] 바둑과 도는 하나다 … 깊고 맑은 기운 넘친 '반상의 거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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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56년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주최한 특별 3번기에서 우칭위안(왼쪽)이 하시모토 우타로 9단(오른쪽)과 대국하고 있다. 이날 자리는 하시모토의 왕좌전 2연패를 기념해 마련됐다. [사진 일본기원]
우칭위안이 지난 7월 100세 기념식에서 부채에 쓴 휘호. ‘하산일국기(河山一局棋)’ 글자가 선명하다. ‘세상은 한 판 바둑과 같다’는 뜻이다.

바둑은 예부터 도(道)와 관련이 깊었다. 사람들이 바둑의 이치를 주역이나 음양에서 찾으려고 노력해온 이유다.

 지난달 30일 타계한 우칭위안(吳淸源·1914~2014)에게도 도와 바둑은 하나였다. 선생은 노년에 “바둑과 종교를 따로 떼어놓고서는 내 인생은 없다”고 회고했다. 선생은 2500년 바둑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거인이다. <중앙일보 12월 2일자 27면

 하지만 바둑과 도는 본래 긴장 관계에 있다. 바둑은 기예(技藝)이기 때문이다. 기예는 표현되는 것, 몸과 의식을 벗어날 수 없다. 반면 도는 소위 언어도단으로 몸과 의식을 벗어나 있다. 서로 간에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칭위안은 이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첫째는 마음의 수양이었다. 그는 “거울의 표면을 닦지 말고 내면을 닦아라”라고 강조했다. 마음의 평온 없이 바둑의 깊이를 얻는 것은 어렵다. 소위 평상심 없이는 전쟁터인 반상에서 바른 안목을 가질 수 없다.

 둘째는 철학의 적용이었다. 우칭위안은 젊은 시절 도가 고전 『여조전서(呂祖全書)』를 늘 옆에 두고 살았다. 도가의 가르침은 자연과의 합일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와의 합일이다. 핵심은 전체성(totality)이다. 세상을 분리해 이해하지 않는 태도, 즉 극단을 버린 지혜다.

 바둑에서 중시되는 실리와 세력은 그 어느 것도 전부가 아니다. 세력과 실리는 상대적인 것으로 서로 다른 이름일 뿐이다. 초점은 조화다. 1933년 그가 기타니 미노루(木谷實·1909∼75) 5단과 함께 발표한 ‘신포석(新布石)’의 요체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포석은 일본 전통 300년의 구포석을 넘어서는 세계관의 혁명으로 현대 바둑의 기틀이었다.

 바둑은 힘든 일, 노동이다. 20세기 초에는 한 판을 사나흘 두었다. 우칭위안은 어릴 적부터 허약했다. 1928년 일본에 처음 왔을 때 대국 자세가 좋지 않아 말도 많았다. 당시 일본의 여러 신문이 “몸을 너무 숙여 바둑판을 덮다시피해 좋지 않다”고 썼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신문은 “푹 숙이던 상체가 꼿꼿해졌다”고 썼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때 귀의했던 도교 계통의 홍만교(紅卍敎)와 일본 신흥종교 새우교(璽于敎)를 넘어서서 평생을 수행했다. 명상으로 기(氣)가 발생하면 기가 척추를 밀어 올려 허리가 곧아진다. 소위 독맥(督脈·등쪽의 기맥)의 발달이다. 나아가 이마가 열려 안목도 밝아졌는데 100세 장수의 비결이기도 했다.

 타고난 천품과 철학, 수양에 노력이 더해졌다. 일본에 온 후 모친 등 다섯 가족이 스승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1889~1972)의 뒤채에서 10년을 살았다. 언제나 바둑을 끼고 살아 세고에가 의사를 데려와 요양을 시킬 정도였다. 어릴 때도 두꺼운 바둑책을 손에 놓고 보느라 이미 엄지와 검지가 굽어졌었다.

 수행과 철학, 노력으로 쌓아 올린 그의 바둑은 깊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맑았다. 이 때문에 조훈현(61) 9단은 “내게 유일하게 영감을 준 바둑”이라고 말했다. 일본 바둑 최고의 명예 혼인보(本因坊)를 9연패했던 다카가와 가쿠(高川格·1915~86) 9단은 “우칭위안과 두면 한 판에 적어도 세 번은 의외의 수가 나온다”고 했다.

 평생의 자랑으로 “우칭위안을 일본에 데려온 일”을 꼽은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1907~94) 9단은 그 덕택에 치수 고치기 10번기에서 우칭위안에게 패배했다. 재능과 재능은 본래 마주하면 서로 부딪쳐 싸우기 마련이지만 대범한 하시모토는 우칭위안의 재능에 감복해 생애 내내 우 선생을 아꼈다.

 1936~59년 치수 고치기 10번기에서 당대 1인자들과 싸워 모두 이긴 일은 우연이 아니었다. 승부를 끝내려면 1년이 걸린다. 기사들은 승부의 중압에 밤낮으로 눌렸다. 하지만 수양을 쌓은 우칭위안에게 승부는 관조였다. 대국장에 나타날 때 상대는 이미 강박으로 눌린 상태지만 우칭위안은 평상심이었다. 면도날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1920~2010)도 10번기에서 패배한 직후 “역시 긴 승부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고 승복했다.

 은사(隱士)의 맑은 기운이 넘치는 우칭위안을 만난 후 구한말의 국수(國手) 노사초(1875~1945)는 아들에게 말했다. “너, 기린을 본 적 있느냐.”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는 그를 두고 ‘동양정신의 정수’라고 평했다.

 물론 천재에게도 인생의 굴곡은 예외가 아니었다. 세 번에 걸친 국적 변동만 해도 동아시아 정치 변동을 넘어선 개인적 고통이었다.

문용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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