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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펙이 장그래와 다르게 사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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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도은 사는 것과 쓰는 것에 주목하는 라이프스타일 기자입니다. 이노베이션 랩에서 브랜디드 컨텐트를 만듭니다.
이도은
중앙SUNDAY 기자

드라마가 현실에 바탕을 둔다는 게 맞기는 맞다. 최근 방영 중인 인기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를 똑 닮은 이를 만났기 때문이다. 패션 디자이너 박종우(30)다.

 그 역시 장그래처럼 고졸이다. 장그래에게 어릴 때부터 매진한 바둑이 있었다면 그는 학창 시절 공부는 뒷전인 채 펑크록에 빠졌다. 대학 대신 어찌어찌 입학한 패션스쿨에서는 부적응자로 낙오했다. 마치 장그래가 후원자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에 들어갔다 버티지 못 하고 나온 것처럼 말이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도 둘 다 같다. 군 복무를 마친 이후다. 장그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요새 보기 드문 청년’이라는 소리를 듣고 대기업 상사에 낙하산으로 입사하고, 박씨는 일본 패션학원에 들어간다. 국내에서 알아주는 이름값 있는 곳이 아닌, 실무에 강하다고 평가를 받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갈림길이 된다. 회사원 장그래는 우정보다 앞서는 ‘갑’의 정신, 상사의 공로 가로채기, 여성에 대한 비하 등의 상황을 조용히 목도한다. 바둑을 했다는 이력을 숨기고, ‘양과 질이 다른’ 노력에만 올인한다. 무엇보다 비정규직에 대한 애환을 느낀다. 부서를 위해 가장 혁혁한 공을 올렸다고 칭찬하던 상사는 정규직 전환에 대해선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연봉계약서 체결, 명절 선물 등에서 은근히 드러나는 정규직과의 차별을 그는 애써 외면한다.

 토익 성적 하나 없는 박씨도 언제든 장그래가 될 수 있었다. ‘월 10만원짜리’ 디자이너 브랜드의 인턴이나 패션 브랜드의 비정규직 자리가 다음 코스로 뻔했다. 하지만 달랐다. 취업 대신 학생 신분으로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살던’ 과거를 백분 활용했다. 한때 용돈을 벌었던 가죽 공장을 찾아가 소량의 샘플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어릴 때부터 모아 온 한 브랜드 신발 70켤레의 사진을 찍어 협업을 제안하는 편지를 사장에게 보냈다. 그런 노력이 조금씩 빛을 봐 그는 이제 일본 최고의 디자이너 레이 카와쿠보의 러브콜을 받고, 제일모직이 지원하는 디자이너 육성 프로그램 ‘삼성패션디자인펀드’의 수혜자가 됐다.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2일 서울에서 열린 현대차 주최 토크콘서트 ‘왓 이즈 더 프레임’에서 그 답을 찾았다. 강연자로 나선 만화가 강풀은 ‘프레임 밖에서 프레임을 생각하라’라는 말로 사고의 전환을 설파했다. 스펙으로 무장해야 겨우 밥벌이를 얻는 고용 프레임, 하지만 박씨는 하나를 파고드느라 모자랐던 스펙을 다른 것으로 메웠다. ‘그냥 보내는 시간은 없었다’면서 말이다. 아무리 좋은 기억력과 성실성을 지녔어도 영어에 막히고 회계에 좌절하는 장그래와 대조되는 부분이다.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생의 한 대사다. 하지만 박씨를 보면 어쩌면 길은 계속 생겨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도은 중앙SUNDAY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