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헌법에 대한 신뢰회복이 우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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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인류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국가권력의 제한을 기본원칙으로 하는 헌법에 의한 지배를 경험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300년 남짓하다. 입헌주의가 신체제의 지배 이념이 된 이후에도 제대로 실현되기까지에는 또 다른 몇 세기의 시간과 수많은 선각자의 피와 땀이 필요했다.

▶ 김종철 연세대 교수.헌법학

그러나 오늘로 광복 60년, 공화국 출범 57년을 맞는 우리에게는 아직도 입헌주의가 낯설다. 입헌국가를 지향해 오면서도 헌법은 위정자나 일반 국민의 의식에서 아직도 주먹이나 지역주의보다 훨씬 멀리 있다.

무엇보다 입헌주의의 기초인 사회계약의 인식이 박약한 탓이다. 말로만 주권자이지 국민이 스스로의 욕구에 의해 헌법을 만들고, 그 규범이 일상생활의 준거가 돼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한 것이다. 헌법은 각종 공무원시험의 과목으로서 입신양명의 수단에 불과했다. 그나마 고시에서도 헌법은 구조조정의 대상이다. 조만간 행정고시에서 헌법 과목이 사라진다. 헌법에 의해 창설된 권력을 헌법정신과 그에 따른 절차 및 요건에 따라 실행할 담당자들을 선발하기 위한 시험에서 헌법을 배제할 발상을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이 나라 입헌주의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자신의 존재 이유인 헌법은 몰라도 파편화된 전문지식의 기술적 적용에만 능한 맹목적 테크노크라트에 의해 지배되는 우리 공동체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온 나라가 벌써 몇 주일째 도청사건으로 떠들썩하다. 그럼에도 정작 중요한 것은 간과되고 있다. 도청 문제도 중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리고 과정이야 어떻든 드러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정.경.검.언 유착을 근절할 대책도 필요하지만, 정작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헌법에 대한 신뢰의 상실이다.

우리 헌법은 대의민주주의를 입헌주의의 실현 방법으로 채택한다. 대의민주제는 주권자인 국민은 원칙적으로 국가권력을 행사할 담당자의 선출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실질적인 주요 국정은 국민의 대표들이 수행하는 체제다. 또한 국정 수행과 관련해 국민 대표는 독자적 결정권을 위임받았으며 그 선출에 관여한 현실적 국민의 구체적인 의견에 직접 기속되지 않는다. 즉 자유위임의 원칙이 인정된다. 결국 국민과 대표의 이원체제를 의미하는 대의민주체제는 헌법에 의해 형성되는 정치체제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언론이나 시민사회가 권력에 대한 감시를 통해 국민의 신뢰 형성을 돕는다. 만일 이 신뢰 형성 체제가 무너진다면 이원화된 대의체제는 더 이상 국가통합과 사회통합의 헌법적 과제를 안정적으로 실현할 수 없다.

국가권력이든 사회권력이든 위나 아래나 할 것 없이 입만 열면 뱉었던 말들이 모두 거짓이었음이 드러나니 입에 발린 사과만으로 사라진 신뢰가 억지로 되살아날 리 없다. 바로 여기에 제대로 된 자기반성이나 과거청산이 없는 우리 역사의 빈 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과거 청산은 단순히 과거의 전비(前非)를 뒤적거려 한 인생을 단죄하는 인적 청산의 문제가 아니다. 입헌주의의 전제인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에 대한 신뢰의 문제다.

불법을 자행한 국가권력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지 않고 어떻게 그 권력에 우리의 기본적 인권을 제한할 수 있는 헌법적 권한을 위임할 수 있을 것인가? 민주공화국의 기본질서를 법 위에 서서 조롱한 사회권력을 두고 법치를 위해 모두 잊고 가잔다고 그 누가 따라 나설 것인가? 이 나라 국민이 언제까지 지역감정에 얽힌 음모론에 자신과 국가의 운명을 내맡길 것으로 보는가?

모든 현안에 대한 대책은 헌법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마련돼야 한다.

김종철 연세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