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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외교가 ‘신인류’ 국립외교원 첫 수료생 43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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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난달 서울 서초동 국립외교원에서 외교관 후보생들이 참여하는 ‘가상 유엔 기후변화회의’가 열렸다. 외교역량을 키우기 위한 협상 과목 수업의 일환이다. 한국 대표 역할을 맡은 후보생이 의견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국립외교원]

외교가에 ‘신(新)인류’가 나타났다. 아직 외교관은 아니다. 민간인이다. 그런데 외국에 나갈 때는 관용여권을 쓴다. 외교부 장·차관 보좌관들이 쓸 법한 유엔회의 연설문도 작성한다. 일본 외무성 국장과 위안부 문제를 놓고 담판하는 훈련도 받는다.

 이들의 정체는 외무고시를 대체하기 위해 설립한 국립외교원에 처음 입학(?)한 후보생 43명이다. 국립외교원에 세워진 고려시대 외교가 서희의 동상을 보며 꿈을 키워온 43명이 지난 21일 외교부 입문 코스를 마쳤다. 윤덕민 국립외교원장이 ‘지옥의 과정’이라고 명명했던 코스다.

 이들이 외교관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제도의 문을 들어선 건 지난해 12월 16일이다. 한 번의 시험만 합격하면 외교관이 되는 방식으론 소신과 전문성을 갖춘 우수 인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따라 외무고시는 지난해 상반기 시험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외교부는 후보생을 선발해 국립외교원에서 집중 교육한 뒤 외교관으로 임용하는 ‘선 교육 후 임용’ 방식을 도입했다. 이번에 교육과정을 수료한 1기 후보생은 3차에 걸쳐 진행된 선발시험에서 27.1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이들이다.

 후보생들은 49주 동안 총 3학기, 30여 개의 과목을 교육받았다. 수업은 ▶공직소명의식 ▶전문지식 ▶외교역량 ▶외국어 등 네 개 축으로 진행됐다. 특히 외교역량 분야에서 실전에 곧바로 투입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자질을 키우기 위해 하드트레이닝을 받았다. 협상·교섭 능력 배양, 외교문서 작성 방법, 공관 업무까지 다양한 과목에서 가상 훈련을 거쳤다. ‘실전’에 방점을 찍은 과정이었기 때문에 실무 전문가들이 강사진에 대거 포함됐다.

 전·현직 외교관들이 강사의 40%를 차지했고, 공로명·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 등 원로 외교관들이 석좌교수로 위촉돼 수시로 특강했다.

 후보생들은 학기당 10~12개의 과목을 수강하고, 매 학기 과목별로 중간·기말고사를 치렀다. 이렇게 여섯 차례의 시험 성적을 종합해 최종 성적이 나왔다. 후보생 선발시험까지 합하면 한 명이 1년여 동안 40번 가까이 시험을 치른 셈이다. 효과적으로 역량을 평가하기 위해 지필고사뿐 아니라 ‘무형평가’도 했다. 특정 상황을 주고 프레젠테이션, 그룹 토의 등 다양한 방식으로 후보생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측정하는 평가였다.

 주제가 되는 상황은 실제 한국의 외교 현안들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지금 당신은 한국 정부의 대표로서 일본 외무성의 대표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해야 한다. 과거 한·일협정으로 모든 보상이 해결됐다는 일본의 입장을 압도할 국제법적 논리를 제시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현재 이상덕 외교부 동북아국장과 이하라 준이치(伊原純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 간에 진행되고 있는 협상 과제를 주제로 한 것이다. 지난 9월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던 유엔총회 기후변화정상회의를 주제로 “당신이 한국의 외교사절이라고 가정하고 회의 연설문을 작성하라”는 문제도 있었다. 6자회담 상황을 가정해 각 당사국의 대표 역할을 나눠 맡아 논쟁을 해보라는 과제도 나왔다.

 후보생들은 보통 오전 7시쯤 국립외교원에 왔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엔 국립외교원 앞에 택시들이 진을 쳤다. 시험 기간이나 조별 과제가 늦어질 때는 집에 돌아가 새벽 서너 시까지 공부하는 일도 잦았다고 후보생들은 말했다.

 외무고시를 준비하다 입교한 서민성(28·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씨는 “과목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어려웠다. 수업하다 중간에 나가 먹은 걸 다 토해내고 들어와 다시 수업을 듣는 후보생도 있었고, 1학기에는 정말 많은 친구가 병원을 드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씨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고 강조했다.

 윤덕민 국립외교원장은 “미국 아이비리그의 2년 석사과정을 1년으로 압축한, 상당히 혹독한 훈련이었다”며 “미안하기도 하지만 한 명도 중도 포기 없이 잘 마쳐줘 자랑스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성취도 5.0 만점에 2.5를 넘지 못하는 과목이 전체의 70%가 넘는 후보생은 임용 자격을 박탈당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과락자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수석·차석 등의 구분도 없다. 후보생 모두가 각기 지원한 분야에서 일정 수준의 전문성을 획득했다고 보고 성적에 따른 시상을 하지 않기로 국립외교원 측이 결정해서다.

 다만 43명 모두가 외교부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규정상 10%에 해당하는 4명은 외교관으로 임용될 수 없다. 탈락한 4명이 외교관이 되려면 국립외교원에 다시 들어가 1년 동안 정규 교육과정을 재수하고, 상위 90% 안에 들어야 한다. 재수생들의 경우 입교를 위한 후보생 선발시험을 1차만 면제해 준다.

유지혜·정원엽 기자 wisepen@joongang.co.kr

본지 ‘서희외교아카데미’ 어젠다 제시 … 정부서 받아들여

대한민국이 처음 외교관을 선발한 건 한국전쟁이 발생한 1950년이다. 당시 고등고시 행정과 3부(외무) 시험으로 2명을 선발했다. 한 명은 미국 유학 후 재무부를 거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고(故) 김학렬 장관이고, 다른 한 명은 전상진(86) 전 유엔대사다. 전 대사는 32년7개월간 외교관 생활을 하며 초대 외무부 차관보를 거쳐 카메룬·말레이시아·유엔대사를 지냈다. 68년엔 3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 외무직렬이 만들어져 18명을 뽑았다. 외교관들은 이를 ‘외시 1회’로 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외시 3회 출신이다. 시험이 ‘외무고시’라는 이름으로 바뀐 게 74년이다. 최초의 외무고시 여성합격자(김경임 전 튀니지대사)는 12회에 나왔다. 79년과 80년에는 역대 가장 많은 50명씩을 뽑았다.

 97~2003년은 외무고시가 1, 2부로 나뉘었다. 6년 이상 외국에 체류한 경험자들을 따로 선발했다. 하지만 ‘외교관 출신 자녀들의 등용문’이란 비판을 사 2004년 폐지됐다. 본지는 2007년 정예 외교관 양성을 위한 ‘서희외교아카데미’의 필요성을 신년 어젠다로 제시했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외교아카데미 신설’(2010년) 및 ‘외무고시 폐지’(2013년)를 순차적으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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