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포럼

문희상 의장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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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께.

기억나십니까. 6년 전쯤인가요. DJ 정권 때였죠. 국정원 기조실장을 하실 때입니다. 고교 동문 모임이었던 것 같네요. 그때 이렇게 말하셨죠. 기조실장이 되자 선배님은 자신의 파일을 봤다고 했지요. 국정원 파일 말입니다. 깜짝 놀랐다고 하셨죠. 그 속의 녹취록을 보고서 말입니다. 한정식 집에서의 대화 내용이라 하셨죠. 장장 3시간짜리요. 야당 시절의 거라 했죠.

이런 표현을 쓰셨습니다. "얼마나 그대로 옮겨서 적어 놓았는지 '숨소리'까지 느껴질 정도였어." 그러면서 YS 정권을 비난하셨습니다.

마무리는 이랬습니다. 지금은 불법 도청을 안 한다고요. DJ 지시로 없어졌다고 말입니다. 거짓말 같진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거짓말이라면 아예 말을 안 했겠지요. 녹취록 얘기 말입니다. 조직의 비밀이니까요. 그걸 털어놓는 건 말이 안 되지요. 없어졌다고 봤으니 했겠죠. 지금 보니 선배님도 속았던 겁니다. 이후에 알았는진 모르겠네요. 그러나 적어도 그때는 그랬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선배님은 야당의 공격 대상입니다. 선배님이 당시 도청에 관여했다고 봅니다. 얼마 전 국정원 발표가 그 근거지요. DJ 시절에도 도청을 했다고 했습니다. 기조실장이라면 모를 리 없다는 거지요. 예산편성과 집행의 책임자이니까요. 도청 예산도 알았을 거라는 논리죠. 선배님은 부인했습니다. 옆방의 일을 알지 못했다고요. 틀린 얘기는 아닐 겁니다. 정보기관이란 곳이 그런 거니까요. 예산도 마찬가지지요. 일반 부처 예산과는 다릅니다. 기조실장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닐 겁니다. 저는 그걸 의심하지 않습니다. 진위는 차차 밝혀지겠지요.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지금 선배님은 특별법을 만들자고 합니다. 도청 테이프를 공개하자는 쪽입니다. 모두 까발리자는 거지요. 그러나 문제는 공개키로 했을 때입니다. 위헌 여부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법률가의 몫입니다. 투명성과 형평성을 얘기하는 겁니다. 선배님은 자신의 테이프가 공개돼도 괜찮은 모양입니다. 그러니 공개하자고 하겠지요. 그런 판단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신의 녹취록을 봤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보지 못한 사람은 어떨까요. 감히 공개하자고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선배님은 어떻게 봤습니까. 권력을 쥔 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변수는 의외로 큽니다. 이런 경우도 상상할 수 있겠죠. 선별 공개 말입니다. 몇 개 감춰 놓고 공개하는 겁니다. 아무도 모르게 말입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권력을 생각해 보세요. 가능했을 겁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의심할 겁니다. 과거의 권력을 생각하니까요. 불법 도청을 했던 권력 아닙니까. 때문에 아무리 투명해도 믿지 않을 겁니다.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편을 생각해 보세요. 권력을 쥐지 않은 쪽 말입니다. 지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잠도 못 잘 겁니다. 우선 무엇이 도청됐는지를 모르잖아요. 더군다나 그들은 권력을 반대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도청을 당한 주된 이유지요. 결국 남는 게 뭡니까. 권력에 순종하라입니까? 그래선 안 되지요. 물론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지 모릅니다.

문제의 'X파일'은 이미 공개됐습니다. 물론 그것도 불법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공개됐다고 다른 것도 공개해선 곤란합니다. 여권에선 형평성을 얘기하더군요. 그러나 불법 자료끼리의 형평성을 논할 순 없습니다. 그 자체가 불법입니다.

한 시대를 정리하자는 취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리해선 안 됩니다. 정리되지도 않습니다. 역사의 흐름에 맡기시지요. 모든 건 뿌린 대로 거둡니다. 거의 예외가 없지요. 그래서 오늘도 온 겁니다. 내일도 그렇게 올 겁니다. 그게 모여 역사가 되는 거지요.

이연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