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존재증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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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독립기념관」의 건립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여당인 민정당의 예결위원회가 내년 예산에 독립기념관을 위한 조사설계비를 반영토록 결정한 것이다.
민정당은 우선 전체 설계비의 5% 정도를 계상하고 구체적인 예산작업을 하고있다.
광복 이후 줄곧 논의만 되어왔으나 결실을 보지 못한「독립기념관」건립문제에 새로운 희망을 던져주는 것이다.
그러나 일면 이 논의가 일본교과서 왜곡파동의 와중에서 제기되어 안타까운 마음도 인다.
그것은 우리가 주체적 판단과 독립적 의지로 결단을 하지 못하고「독립기념관」건립문제마저 결국 외부의 충격을 받고서야 비로소 추진의 명분을 얻고있는데 대한 유감이다.
또 이번 논의가 여당에 의해 다시 제기되고 있으나 과거 여러 차례의 좌절에서 보였던 것 같은 용두사미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이 논의가 재개된 이상 이번만은 꼭 부끄럽지않은 매듭이 이루어지도록 정부와 여당이 결속된 힘을 발휘해주기를 당부하고 싶다.
그것은 한때 주권을 빼앗기고 민족적 수난을 감수해야 했던 민족이 스스로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의 발전을 기하는 결의를 보이는 상징적 징표로서 불가결한 때문이다.
광복된지도 벌써 37년이 경과했기 때문에 그 민족적 결의는 너무 때늦은 감이 짙다.
2차대전의 종막과 함께 필리핀은 일제침략의 역사를 후세에 가르치기 위해 독립관부터 세웠다.
이스라엘은「신의 손길」이란 뜻의「야드바 쉠」을 세웠다. 유대인의 수난사 박물관이다. 거기엔 6백만 유대인 학살의 증거가 처절하게 전시되고있다.
학살된 유대인의 기름으로 만든 비누, 나치병에게 맞을 때 사용된 피가 엉겨붙은 채찍, 배고픔에 뜯다 남긴 허리띠 등이 유대인 후손들의 경각과 단결을 호소하고 있다.
공산국가 동독에서마저도 민족사의 맥락을 일정한 역사철학으로 수렴하는 독일역사박물관 세우고있다.
「독립기념관」이나「민족사박물관」은 따라서 과거 유물의 전시장만은 아니다. 민족의 수난과 저항의 증거만이 전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민족혼의 전시장이며 민족정신의 미래상이 펼쳐지는 엄숙한 전당이다. 수모를 당했기에 오히려 민족을 고무할 수 있다. 저항했기에 긍지와 자부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민족의 존재증명이며 미래를 위한 이정표이다.
그것 없이 민족은 자신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고 그것 없이 민족의 영원한 지속을 자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아직「독립기념관」이 없다. 부끄러운 일이다.
76년부터 대대적으로 추진되던「민족박물관」계획이 작년에 취소된 것도 예산부족이 이유였다.
그러나 그런 이유는 성립하기 어렵다. 민족의 자각이 부족하고 민족의 정기가 올바로 살아있지 못했던 증거일 뿐이다. 그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자괴가 지금 있어야겠다.
그러나「독립기념관」의 건립을 추진하는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과 명분의 합리적 조화다.
민정당은 지금 혼자서 별도 건물의 건립을 계획하고있고 정부는 정부대로 중앙청의 종합박물관화 계획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청건물의 박물관화 계획은 여론의 찬반이 엇갈리는 가운데 정부로선 기존방침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이미 국립종합박물관 (7월 13일) 논의에서 밝힌 바대로 중앙청건물의「민족수난사 박물관화」와 종합박물관의 별도 건립을 권하는 것이다.
중앙청건물이 민족수난사의 대표적 상징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부끄러운 역사를 건물의 철거로 씻을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수모와 수난의 상징을 역으로 민족혼의 교장으로 바꾸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고 당당한 태도라는 생각이다.
「독립기념관」논의의 재연에 붙여 정부와 여당이 이 민족적 과업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중지를 합함으로써 만대에 유루를 남기지 않기를 당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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