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운영 칼럼

차라리 '경무대'가 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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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나도 한때는 '확신범'이었다. 사람값은 오를수록 좋고, 돈값은 내릴수록 좋다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값을 앞세우는 북유럽의 복지국가 모형이 부러웠고, 0.25% 정도의 금리인상으로 달아오른 증시에서 뭉칫돈을 빼내 은행 예금으로 돌려놓는 선진국 중앙은행의 정책 효율에 탐이 났다. 그러나 빛에는 그늘이 있는 법. 나는 여전히 사람값이 올라야 한다고 믿지만, 목하 이런 식의 투쟁에 대해서는 크게 의문이다. 총파업(genest)은 본래 '족보 있는' 말이다. 노동계가 정권을 상대로 한판 승부를 벌이는 혁명 전야에나 쓰는 전략인데, 요즈음 툭하면 꺼내는 무기가 총파업이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금리인하에 따른 '이자 생활자의 안락사'를 예언했다. 그는 임금이나 지대와 달리 이자는 어떤 희생의 대가가 아니라 희소성에 대한 보상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의 살인적 경쟁에서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로 변했다. 임금 상승은 복지 향상의 자부는커녕 대외 경쟁력 추락의 원흉이 되었다. 이자 생활자의 안락사와 함께 자본주의의 안락사도 뒤따를 참이었다. 결국 나의 확신은 옛날 금잔디 동산의 추억이 되고 말았다.

지난 2월 설 대목을 전후하여 '애국 소비'강조로 기지개를 켤 것도 같은 경기가 다시 주저앉았다. 당시 이헌재 부총리 개인에 대한 신망을 겸해서 서비스산업 개편에 대한 그의 주장이 관심을 모았었다. 불황 탈출의 계기를 서비스업종 개혁으로 잡고, 당대의 백가쟁론(百家爭論)과 달리 수요 진작보다는 공급 구조 개선에서 찾자는 것이었다. 터키를 방문 중인 대통령이 "한국 경제는 완전히 회복됐다"면서 "상당 기간 특별히 '사고만' 안 치면 쭉 뻗어나갈 것"이라고 말한 것이 대강 이 무렵이다. 직장을 잃고 가장 손대기 쉬운 분야가 택시 운전이고 요식 사업이기에 그 구조조정은 사뭇 절박한 과제였다. 그러나 그 개혁 의지는 제과점과 세탁소에의 자격증 부과라는 한바탕 만담으로 끝나고, 택시요금 인상조차 승객은 물론 기사들한테도 시큰둥한 대접을 받았다.

도대체 백약이 무효였다. 정부 재정을 상반기에 집중적으로 집행하고, 미국과 역금리 현상을 우려할 만큼 국내 금리가 떨어지고, 종합주가지수가 1000포인트를 훌쩍 넘어 시가총액이 500조원에 이를 정도로 증시가 호황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연초만 해도 5%를 넘나들던 성장률 전망이 3%대로 내려앉고 말았다. 문제는 정권에 대한 항심(恒心), 신뢰의 결핍에 있다. 예컨대 대통령은 경제에 대한 올인을 거듭 다짐했었으나, 최근에는 경제민생점검회의 주재를 국무총리에게 넘겼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부동산 투기를 잡겠다더니 얼마 전부터는 밥보다 앞서는 정치 공연으로 그 올인의 강조가 바뀐 듯하다. 무릇 세상사라는 것이 받는 쪽에서 산통이 깨질세라 조마조마하기 일쑤인데, 어쩐 영문인지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200만㎾나 되는 전력을 보내는 '중대 제안'을 한다면서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그 자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하다못해 유상인지 무상인지 내부 합의조차 하지 않고 덥석 발표부터 해버렸다. 행여 안 받으신다면 어쩌나, 혹시 딴 말씀을 하시면 어쩌나 오히려 주는 쪽이 안절부절못한다. 대체 무엇에 홀려서들 이러는가? 이럴 경우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를 넘어 비굴(卑屈)이 된다.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경포대)이니, 경제가 무서워하는 대통령(경무대)이니 한때 가십이 나돌았다. 미국에서도 레이건 후보가 그 특유의 입심으로 유권자의 박수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신의 이웃이 직장을 잃으면 불경기(recession)이고, 당신이 직장을 잃으면 불황(depression)입니다. 그러나 경기회복(recovery)은 카터 대통령이 직장을 잃어버릴 때입니다." 물론 이것은 대통령 중임이 허용된 미국 이야기니, 이를 우리말 버전으로 고친다면 어떻게 될까? 당분간은 '경포대'로 가고, 임기 후반은 '경무대'로 끝나기 쉽다. 북핵.연정.개헌 등 대통령이 즐길 만한 공연 프로그램은 허다하고, 무서워서든 무시해서든 사고만 안 쳐도 경제는 더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