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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전씨 집성촌|경남 합천군 쌍책면 하신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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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청계산을 휘감아 도는 한강의 물줄기가 초여름 햇살을 받아 고깃 비늘처럼 번쩍인다.
경남합천군 쌍책면 하신리. 시조 환성군의 30세손인 완산군파의 후손둘이 5백년가까이 내리 살아온 전씨 성받이마을.1백여 가구에 5백여명의 전씨들이 쐐기풀처럼 억세게 살아왔다.
완산군은 고려 공민왕때 두차례에 걸쳐 홍건적을 무찔러 명성을 떨쳤던 맹장(맹장)이다.이 마을에 최초로 전씨의 뿌리를 내린 인물은 완산군의 증손인 전하민. 그가 이 마을에 터를 잡은 내력은 확실치 않다. 다만 그 또한『이씨조선이 건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대전으로 낙향, 이어 경주일고일의창일내천의 첩첩산중 꼴짜기 마을로 피신한 것 같다』는 얘기가 구전되고있을 뿐이다. .
이마을의 유별난 명물은 다른 지방에서 찾아볼 수 없는 쐐기풀 울타리.
쐐기풀에 한번 찔리면 손·발이 퉁퉁 붓는다. 벌에 씐것 이상인기라. 밤손님(도둑놈)막는데는 안성마춤이제.』
하신리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전달환 노인(71)은 쐐기풀의 신통력을 이렇게 들려준다. 이조의 개국과 함께 내리막길을 걷던 전씨가문의 종족보존의 본능이 쐐기풀 울타리를 둘러치게한 것은 아닐까. 완산군의 후손들은 고려가 다시 재기할 것을 기다리며 청계산 기슭에 은둔, 책을 벗삼아 살았다고 한다.
『전무둔필, 전무백색, 전무백석(글씨 못쓰는 사람없고, 얼굴하얀 사람없고, 백석지기 갑부엾다)』는 이마을 전씨 가문의 전통이자 특색.
전달환노인은 『책을 벗삼아 청빈하게 살았으니 백석지기 부농이 없는 것은 확실하지만 어째서 얼굴빛이 하얀사람은 없는지 모르겠다』며 웃는다.
그러나 완산군의 후슨들은 끝까지 쐐기풀 울타리속에 안주하지는 않았다. 임난의 전운이이 땅을 휩쓸자 의병의 선봉에 서서 분연히 항거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전치원과 전제.전치원은 서예와 성리학(성리학)에 능통했던 당대의 문장.
그는 임난이 발발하자 의병으로 참전, 난중일기인 임계한이녹을 남겼다.
완산군의 22대종손인 전호열씨(41)의 집 안마당에 자리잡은 아담한 장서각.
선조들이 남긴 문집·글씨·목판·벼루·교지(재지)등 2백50여점의 유품이 보관돼 있다. 이중 전치원이 썼다는 임난일기『임계난리녹』과 그의 손자 전형이 인조14년에 일본통신사로 다녀오면서 기록한 견문록『해주일기』는 귀중한 역사적인 자료다.
호열씨의 집 대청마루에 오르면 눈앞에 펼쳐지는 청계산. 황강을 건너 도보로 30여분쫌 청계산등성을 넘으면 전두환대통령의 출생지인 속곡면 내천리에 닿는다.
전대통령은 완산군의 23세손. 선조의 고향은 원래 하신리 였으나 증조 전석주 어른이 내천리로 이사를했다.
『산세(산세)가 수려해서 대통령이 안나왔나. 청계산 열두봉우리의 형상이 기막힌기라. 장원급제봉, 도덕봉(도덕봉), 문필봉(문필봉), 홍덕봉(홍덕봉),어봉(어봉)등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의 혈장이 천군만마를 지휘하는 명장이 마상(,마상)에 의연히 앉은 모습과 흡사한 기 라.』
전삼규씨(55)는 전대롱렴의출생을 품수지리로 풀이한다.
『책을 벗삼아 살았기 때문에 떼돈을 모은 재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
하신리는 빛바랜 시외버스가 터덜터덜 산길을 달리는 적막한 한 촌이다.
그러나 이마을 전씨 일가는『대롱령을 배출시킨 가문이라는 자부심으로 산다』며 자랑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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