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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의 전설 세계를 노크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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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호 09면

4일 중국 상하이 워터하우스에서 열린 ‘K패션 프로젝트’의 제시뉴욕 무대.

‘K패션 프로젝트’는 한국 패션 브랜드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패션협회와 산업통상자원부가 추진하고 있는 야심찬 기획이다. 2012년 뉴욕에서 주요 바이어와 프레스를 초청해 한국 브랜드를 본격 소개했고 2013년에는 뉴욕의 유명 트레이드쇼인 ENK 인터메조의 노른자위 자리를 차지해 한판 쇼를 펼쳤다.

상하이와 뉴욕의 ‘K패션 프로젝트’ 현장

올해는 판을 더 키웠다. 지난 4일 저녁에는 중국 상하이에서도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워터하우스에서 400명이 넘는 현지 바이어와 언론, 패션 피플을 초청한 가운데 화려한 패션쇼를 했다. 한국패션협회가 글로벌 브랜드 육성사업에서 리딩 브랜드로 선정한 ‘제시뉴욕(JESSI N.Y)’, ‘버커루(BUCKAROO)’, ‘지센(ZISHEN)’의 옷을 입은 중국 모델들은 런웨이를 마음껏 활보하며 옷맵시를 뽐냈다.

이에 앞서 지난달 23일에는 뉴욕의 5대 쇼룸(주요 바이어와 언론이 신상품을 체크하는 곳)으로 꼽히는 곳에 처음 한국 브랜드를 입점시키고 맨해튼 한복판 브라이언트 파크 호텔 최고층 라운지로 주요 바이어와 언론을 초청해 국내 브랜드를 입은 미국 모델들과 만나게 했다. 이 행사에 참가한 브랜드는 역시 패션협회가 리딩 브랜드로 선정한 ‘제시뉴욕’, ‘버커루’, ‘데무(DEMOO)’였다.

특히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의상 감독을 맡았던 뉴욕 패션계의 거물 패트리샤 필드에게 두 행사 모두 의상 선정 및 스타일링을 맡겨 눈높이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한국패션협회는 패트리샤 필드가 2012년부터 한국 패션을 뉴욕 패션계에 알려온 공로를 높이 사 K패션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뉴욕에서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번 상하이와 뉴욕 행사에 모두 참가한 업체가 여성복 브랜드 ‘제시뉴욕’의 제시앤코와 프리미엄 진 브랜드 ‘버커루’를 갖고 있는 엠케이트렌드다. 두 곳 모두 동대문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20여 년 동안 차근차근 몸집을 다져온 이들은 이제 세계 시장을 본격적으로 두드리려는 참이다.

‘제시앤코’ 전희준 대표와 남희정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좋은 제품 착한 가격에… 처음부터 해외 시장 꿈꿨죠”

전산학을 전공한 남자와 디자인을 공부한 여자가 1996년 결혼을 한다.

그런데 여자에겐 조건이 있었다. 옷장사를 같이 해야 한다는 것. 수입 수영복 회사 이사였던 남자는 그 조건을 수락한다. 그리고 2년 뒤 딸의 이름을 따 회사를 만들고, 브랜드를 런칭한다. 제시앤코의 전희준(47) 대표와 남희정(45)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얘기다.

“외환위기 직후 숙녀복 시장이 무너진 때였죠. 좋은 제품을 착한 가격에 내놓아 여성 캐주얼 매스티지(masstige·합리적인 가격의 명품) 시장을 주도해보고 싶었어요. 스타일리시한 28세 뉴요커 제시라는 모델을 설정했죠.”

여성 캐주얼을 시작한 동기를 묻자 전 대표는 대뜸 ‘가족력’이라고 말한다. 남 디렉터가 말을 받았다. “어머니와 이모들이 모두 대단한 멋쟁이셨어요. 옷감을 떠다가 직접 해 입으셨죠. 어릴 적부터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어요. 재봉질도 잘했고요. 집안이 옷 얘기로 항상 와글와글했죠.”

“집사람이 서초고를 나왔는데 고등학교 때 별명이 ‘서초 패션’이었대요.”

“제가 중학교부터 교복자율화 시범학교를 나왔어요. 그 덕이 커요.”

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생각했다는 이들 부부가 회사를 세우면서 눈여겨본 것이 이탈리아의 ‘프론토 모다’다.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있는 옷들을 모아놓고 도매로 파는 곳이었다. 이들은 동대문 시장 뒤편에 건물을 빌려 디자인과 제조와 유통을 한 자리에서 해결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오로지 ‘빨리, 싸게’가 모토였던 동대문에서 특유의 촉을 내세워 ‘완벽한 옷’을 추구한 제시뉴욕의 입소문은 금세 퍼졌다. 런칭 6개월 만에 제품을 달라는 매장이 30곳이 넘었다.

“비결이라면 부부 기업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것이죠. 일반 회사는 디자이너 바뀔 때마다 브랜드 색깔이 바뀌는 경우가 많거든요. 또 저희는 원가 절감을 위해 현장을 직접 뛰면서 결정을 빨리 빨리 했어요.”(남)

“저희가 가두 매장이 70%에요. 매장 점주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일로 만났지만 서로의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저희는 어음결제가 없어요. 신뢰가 쌓여야 진정성이 나오거든요. 이것은 중국과 거래하면서도 마찬가지에요.”(전)

2005년 상하이에 중국법인을 설립하고 이듬해 공장도 설립했지만 중국 시장은 쉽지 않았다. 중국은 한 나라가 아니었다. 북방과 내륙과 남쪽이 각각 다른 나라였다. 중국인과 중국 시장에 맞는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조금씩 적응했다.

“올해로 10년이네요. 중국 시장에서 10년간 버텼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해외 바이어들도 이걸 보더라고요. 중국 시장에서도 반응이 오기 시작했고요.”

전 대표는 “트렌드보다 소비자를 읽는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프라이드 있는 소비자는 세일하는 브랜드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희는 세일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좋은 제품을 착한 가격으로 드리고 싶어요. 1년 전에 선(先)기획을 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점주들과 꾸준히 토론하면서 현장의 목소리도 반영하고 있어요.”

남 디렉터에게 제시뉴욕은 어떤 옷일까. “요즘 소비자들은 정보가 많아요. 그런 분들이 딱 볼 때 무궁무진하게 자기 스타일링을 할 수 있는 옷? 룩북을 많이 제작해 매장에 계속 제공하는 이유도 아이디어를 많이 드리기 위해서죠. 주력은 시티룩이지만 이효리처럼 자연 속에서 여유를 추구하는 ‘바바 쿨(Baba Cool)’이라는 컨셉트에도 관심이 있어요.”

스타 마케팅도 한몫했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2006)에서 수술 후 바뀐 김아중이 거리를 활보할 때 입던 옷이 그랬다. “연말 파티용으로 조금 만든 옷인데 스타일리스트 눈에 띄었죠. 영화는 시즌 후에 나왔는데도 입소문을 타고 한 2년 동안 꾸준히 팔렸어요. 요즘엔 스타홍보대행사에서 자기 연예인 돋보이게 할 때 와서들 골라가시더라고요. 그럼 블로거들이 어디 옷이라고 찾아서 올려주시죠.”(남)

2007년부터 정부와 협회의 지원을 받아 해외 전시에 나갔다. 처음에는 한국을 전자제품이나 휴대전화 만드는 나라로만 알았던 바이어들이 이제 ‘너희도 패션하는 국가구나’라고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게 가장 보람 있다고 했다. 남 디렉터의 이름을 딴 유러피언 컨템퍼러리 브랜드 ‘알렉시스 앤(Alexis N)’과 플레이보이와의 콜라보레이션, 북유럽 스타일의 가구 멀티숍 ‘까사 알렉시스’ 런칭도 제시앤코의 새로운 도전 과제다.

“한국에서 만들었다는 게 중요한 가치가 됐어요. 삼성, 싸이, 서울이 대표적이죠. 브랜딩과 가치라는 차원에서 의류 산업은 대단한 벤처 산업인데, 이런 분위기를 잘 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엠케이트렌드 김문환 대표
“청바지 워싱하면 코리아 제대로 보여주겠습니다”

지난달 23일 저녁 맨해튼 한복판 브라이언트 파크 호텔 최고층 라운지. 뉴욕의 패셔니스타 패트리샤 필드가 한국 브랜드 옷을 입은 모델들과 포즈를 취했다. 그는 옆에 선 모델의 셔츠를 가리키며 흥겨워 했다. “최근 버커루와 진행한 컬래버레이션 제품이다. 빨간 머리 젊은 여성의 얼굴이 아주 귀엽지 않나. 보시다시피 내 얼굴을 틴에이저 스타일로 꾸몄다. 미디어가 관심을 갖게 되면 시장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을 것이라 기대한다.”

버커루를 만들고 있는 엠케이트렌드는 동대문 의류시장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1990년 의류 소매업에서 시작해 도매로, 다시 자체 브랜드를 개발하며 몸집을 다져왔다. ‘데님(denim·두툼한 면직물)의 지존’이라 불리던 걸출한 디자이너 김상훈(60) 현 대표이사 부사장이 94년 형님 김상택(62) 현 대표이사 회장과 고향(강원도 양구) 후배로 대기업 바이어로 일하던 김문환(57) 현 사장을 끌어들여 95년 (주)티비제이(2000년 엠케이트렌드로 상호 변경)를 설립했다.

“외환위기 직후 외국 청바지 브랜드가 국내 시장을 휩쓰는 것을 보고 ‘한국 브랜드의 자존심을 보여주자’하고 TBJ에 힘을 집중했지요. 이어 2001년 Old&New(현 ANDEW), 2004년 버커루, 그리고 2011년에는 미국 프로농구 브랜드 NBA를 각각 런칭했습니다.”

김문환 대표는 “특히 버커루는 게스, CK진, 리바이스 등 해외 유명 브랜드들이 대전을 벌이는 프리미엄 진 시장에서 2위를 고수하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프리미엄 진을 표방한 버커루에 처음에는 우려도 많았다. “왜 진을 하느냐, (유행하는) 캐포츠(캐주얼 스포츠)를 하지” “해외 브랜드는 충성도가 높아 뚫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에도 ‘장인정신’과 ‘고가정책’을 고수했다.

“외국 브랜드와 달리 국내 소비자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외국 브랜드는 나온 지 몇 개월이 지나야 들어올 수 있었지만 우리는 최신 스타일을 반영해 빨리 생산하고 또 한국인 체형에 대한 연구와 노하우를 최대한 반영했지요. 특히 외국에서는 한국에서 워싱했다는 것이 커다란 강점입니다. 손맛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국내 1등이 우선’이라는 보수적인 회사 분위기에 내수에만 집중해 오다가 2007년 미국 시장을 처음 구경하러 갔다. “도매가가 생각보다 높아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가 입고 간 옷에 관심들이 높아 저도 놀랐습니다. 그래서 2008년 뉴욕과 상하이, 홍콩에 현지법인을 세우고 해외 진출을 시작했습니다.”

버커루는 2009년부터 시작된 글로벌패션 리딩 브랜드에 한 해도 빠짐없이 선정되며 국내 대표 브랜드라는 입지를 다져갔다. 게다가 인기를 얻기 직전의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삼은 전략이 적중해 스타 마케팅에서도 발군의 안목을 과시했다. 비, 원더걸스, 신세경, 송지효, 김우빈이 대표적이고 올해는 드라마 ‘미생’에서 준수한 신입사원 장백기로 열연 중인 강하늘이 발탁됐다.

김 대표는 “웨스턴 스타일의 버커루와 미국 프로농구 NBA 브랜드라는 두 가지 트랙으로 중국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상하이·뉴욕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한국패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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